60년 전 옛기억 복원한 오래된 새집



사랑채 쪽에서 바라본 안채와 브리지의 모습. 안채에는 원래 이 집에 있었던 옛 창문과 툇마루를 그대로 놓아두었다. 브리지는 3가지 모양의 철망으로 만들어 빛이 여러가지 모습으로 들어오도록 했다.

[매거진 esc] 살고 싶은 집
허물어져가는 한옥의 부서진 기와, 툇마루 살리고 양옥과 나란히 세운 부암동 서석준·김현주씨 집

한옥이다, 아니다 양옥이다. 옛집이다, 아니다 새집이다. 서울 종로구 부암동 환기미술관 담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정체를 알기 어려운 집이 하나 있다. 지난해 9월 집들이를 마친 이 집은 자세히 뜯어보면 두채다. 지은 지 오래된 기와를 이고 있는 왼편의 한옥과 새로 지은 오른쪽 양옥집이 붙어 있다. 원래는 안채와 사랑채로 떨어져 있던 것을 사랑채를 새로 지으면서 두채를 잇는 통로도 함께 지어 두집은 하나로 이어졌다.

기와를 1946년 올린 뒤 
한번도 갈지 않아서 
한푼의 가치도 없다고들 했다 
그런데 지붕을 새로 바꾸면 
이 집의 진짜 머리가 아니라 
가발 쓴 거랑 같다고 생각했다 

하늘에서 본다면 이 집은 작은 대문 자리만 트여진 ㄷ자 모양이다. 지붕도 평탄하지 않다. 들쑥날쑥한 한옥 기와에 비한다면야 새로 지어진 사랑채의 강판 지붕은 단정하고 매끈하지만, 한옥보다 키가 높아지지 않도록 안채와 만나는 쪽 지붕은 쑥 내려앉았다. 한옥 나이 68살. 이 오래된 집을 사들인 집주인 부부의 소원은 옛집의 기와를 그대로 가져가는 거였고, 주변을 위축시키지 않는 적당한 높이의 집을 짓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집을 들추자 기와는 한쪽 편이 내려앉았고 서까래는 손만 대면 바스러졌다. 사실은 기둥이 아니라 오래된 장롱이 지붕을 받치고 있던 기막힌 집이었다고 했다. 옛 지붕을 지키고 높이를 맞추느라 공사 기간이 한달은 더 길어졌고 나중엔 과연 집이 완성될까 모두가 궁금해했단다.

브리지를 지나 사랑채로 가면 먼저 드레스룸을 만난다. 살구색으로 칠해져 햇볕을 받으면 오렌지색으로도, 분홍색으로도 빛난다.
주방 타일은 부인이, 주방 수납장은 남편이 디자인했다. 안쪽 서재는 가족들이 마당을 보며 시간을 보내는 곳이다.

그토록 옛집의 흔적을 고수하려 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집의 주인은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스튜디오 홀호리 서석준(39) 대표와 김현주(38) 애니메이션감독 부부다. 김현주씨는 “예전에 있었던 삶의 흔적이 가급적 남아 있어야 한다는 주의를 지키려고 애를 썼다”며 “이 집의 기와는 1946년 지어진 뒤 한번도 갈지 않아서 다들 한푼의 가치도 없다고들 했다. 그런데 지붕을 새로 바꾸면 그건 이 집의 진짜 머리가 아니라 가발 쓴 거랑 같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남편인 서석준씨도 “조망에 대한 나의 욕망을 우선하느라 남의 시선을 막아가며 산다. 우리 집도 옆집이 2층이 되면서 인왕산이 보이질 않는다. 하지만 조망은 공원에서 하면 충분하다. 원래 있던 집을 리모델링해서 쓰는 거니까 우리 집을 더 높이지 않았다”고 집이 몸을 낮춘 이유를 설명했다. 예전 한옥은 지금 사람들 몸에는 턱없이 낮고 작다. 건축가는 구들을 들어내고 바닥을 35㎝ 정도 파서 지붕을 높이지 말자는 집주인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대나무로 만든 대문을 밀고 들어가면 우선 이 집의 열린 마당을 만난다. 능소화, 인동덩굴, 라일락, 허브가 자라는 향기로운 마당이다. 전에 살던 할머니가 물려준 35년 된 능소화 덩굴이 다칠까봐 공사할 때도 마당에 포클레인이 들어오지 못했다. 건축 설계와 시공이 분리된 지금 건축 시스템으로는 태어나기 어려운 집이었다. 그림책 작가이기도 한 김현주씨는 설계도에 일일이 일러스트를 입혀가며 자신이 살고 싶은 모양을 그렸다. 그사이 목공과 요리가 취미인 남편은 싱크대 공장을 드나들며 직접 싱크대와 주방 수납장을 만들었다. 서석준씨는 “이 집은 우리의 ‘똘기’가 빚어낸 총체적 삽질이었다”고 평했지만 ‘똘기’라면 건축가들도 못지않았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부암동 집의 모습.

제이와이아키텍츠의 젊은 세 건축가, 원유민, 조장희, 안현희 소장들은 지역 저소득층 가족을 위해 ‘4000만원으로 집짓기’ 등의 불가능 프로젝트를 수행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직접 인부를 고용하고 나중엔 정말 ‘삽질’을 했다. 삽으로 구들을 파내는 작업을 감당하지 못하고 툭하면 인부들이 도망가버렸기 때문이다. 원 소장은 “사실 건축적으로는 완전히 수명이 다한 집이었다. 썩어버린 기둥과 보들을 대신해 철근빔으로 구조를 보강하고 집 전체를 들어올려 기울어진 집을 바로 세웠다. 마치 의족을 달아주는 느낌이었다”고 설명했다. 건축가는 무너져가는 옛집에 철근 구조물을 넣어 지탱하고 집의 잔해 속에서 부서진 기와, 오래된 창문, 옛 툇마루를 건져내 새집에 옛집의 기억을 하나하나 꽂아두었다. 집의 오래된 주춧돌에는 옛집의 나무기둥과 철골기둥이 나란히 서 있다.

한옥 마루로 올라서면 주방과 서재가 이어져 있다. ㄱ자 한옥이 꺾이는 지점에 마련된 서재는 바닥을 낮춰 아직 어린 둘째 아이와 큰 첫째 아이가 안전하게 놀 수 있는 놀이방을 겸한다. 한옥 끝부분에는 이 집의 또 다른 정원, 숨은 마당이 내다보이는 열린 욕실이 있다. 욕실 앞을 지나면 사랑채로 가는 통로다. 두 집을 잇는 통로를 건축가와 건축주는 ‘브리지’라고 부르는데, 브리지는 철골구조에 투명한 폴리카보네이트로 벽과 천장을 둘렀다.

아이는 하루 종일 마당에서 논다. 집의 어디서나 가운데 마당을 볼 수 있다.

이 집의 주요 자재는 패기와 꿈이다. 브리지가 그 증거다. 낮에는 온실 같고 밤에 막대기 전등이 켜지면 놀이기구 같기도 한 기다란 복도. 게다가 건축가는 통로에 녹색 철망을 둘렀다. 가운데 마당에서 나무들이 기대 자라기도 하고 철망의 여러 다른 구멍에서 빛이 제각기의 모양으로 쏟아져 내려오는 것을 상상했단다. 복도를 지나면 드레스룸과 또 다른 욕실이 나온다. 욕실 창문은 턱없이 높거나 낮은데 옛 창문을 살리기 위해서였단다. 부암동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지나가며 사진 찍기 좋아하는 나무 창문이 주인공인 공간이다. 다락을 이고 있는 넓은 사랑채는 침실이면서 작업실이다. 이 집의 가장 조용하고 은밀한 공간이다. 유일하게 방문이 달린 곳이기도 하다. 나머지 공간은 마치 ㄱ자의 커다란 방 한칸인 양 트여 있다. 집주인은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사람들답게 페인트로 색을 칠해 공간을 나눴다. 안방은 연한 하늘색, 마당에서 보이는 집의 벽은 파란색 페인트로 칠했다.

복도까지 합쳐 건평 96.2㎡의 아담한 공간. 집주인은 4식구가 안채부터 사랑채까지 우르르 몰려다니며 먹고 놀고 쉬는 공간을 꿈꿨단다. 지금은 7살인 아들이 커서 자기 공간을 요구하면 사랑채에 따로 문을 내거나 하면서 세월 따라 변하는 집을 상상했단다. 원유민 소장은 “한옥은 본래 여러가지 표정이 있는 집이다. 집 안에서 사람들이 움직일 때마다 동선 안에서 시시각각 다른 표현을 만들기를 바랐다”고 했다.

지붕이 있는 곳만 집은 아니다. 봄을 맞아 부암동 서석준·김현주씨네 집 마당 3곳에서는 저마다 다른 꽃이 한창이다. 가운데 마당에서 능소화 가지가 새로 만든 벽을 타고 오르는 동안 욕실 옆 텃밭엔 상추, 바질, 고추가 자란다. 길가에서 넘보게 되는 사랑채 쪽 마당에는 이 집의 오랜 터줏대감이었던 사철나무, 철쭉, 산수국, 찔레 장미가 길가로 가지를 드리우고 있다. 정말이지, 이 집은 한가지로 설명하기 어렵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사진 황효철 작가, 서석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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