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국이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던 네덜란드에서의 생활을 끝내고 다시 한국에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다고 귀국을 계기로
지난 네덜란드에서의 시간들을 모두 이곳에 정리하고, 쏟아내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 동안 간간히 올렸던 글들에서 이미 많이 언급했기도 했거니와
나 스스로도 이곳에서의 생활을 어찌 정리해야 할지 감이 오질 않는다.

다만 20대후반에 와서 30대초반까지를 이곳에 있으면서 느낀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이란 혼자서 살아갈수 없다는, 나를 둘러싼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이다.

네덜란드에서의 나의 삶이란 모든게 다른 분들의 도움으로 만들어고 지속되어 왔다.
델프트에서의 형님, 누님, 동기, 후배들
암스테르담에서 평생의 연을 맺은 나의 또하나의 맘 과 파더, 그리고 여러분들
VMX 의 고마운 사람들

이 모든 사람들이 있었기에 나는 무사히 이시간까지 올 수 있었다.

그들에게, 그리고 주변의 모든이에게 감사하고 살아야 한다.
귀국하는 비행기에 챙겨가야하는 마음이다.

또 하나 네덜란드로부터 가져가고 싶은 마음은 '여유' 이다.
돌아보건데 네덜란드에서는 시간이 마치 천천히 흐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루 24시간을 쓰는건 똑같은데도 불구하고 천천히 걸으면서, 몇십분이라도 의자에 앉아서,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에도 마치 슬로우무비처럼 많은 것들을 생각하고 바라보게 하는 여유가 있었다.
또한 동네를 걷고, 차를 타고 가고, 기차를 타고 가는동안 주변을 관찰하고 느끼고
행복감을 느낀다.

이러한 마음의 여유는 건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에 대해 
의문을 갖게 하고, 다른 관점에서 다시 생각해 보게 하고, 멀리 떨어져 전체를 다시금 보게하는
그러한 여유를 갖게 해준다.
결과물을 '생산'하는 것에 급급했을때 놓치기 쉬운 많은 것들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
하나를 하더라도 많은 생각과 고민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비단 건축가에게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다.
집을 지으면 이들은 여유를 가지고 집을 꾸며나간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완성해 간다는 것이다
한번에 다 만들겠다고 욕심부리지 않는다.
자신이 나이들어 가듯이 집도 함께 완성해가며 함께 나이든다.
이런 여유속에서 그들은 집에 대한, 건축에 대한 철학을 자연스럽게 형성해 간다.

이러한 철학은 무슨무슨 디자인 이론 이라고 불리는,
우리가 책에서 보고 머리로 이해하려는 것들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깊이 네덜란드의 건축에 들어와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제 돌아간다.
바라는 건 지금 이 손에 닿을듯 말듯한 이 느낌들이 한국에 가서도
증발되지 않고 계속해서 내 몸과 마음과 생활패턴에 새겨졌으면 하는 것이다

120201 Y


맘과 파더를 비롯한 암스텔담의 고마운 분들


 

오랜만에 델프트(Delft)를 방문했다.

아마도 귀국전 마지막방문이 되지 않을까 싶다.
벌써 졸업한지 시간이 꽤나 지났기 때문에 아는 분들이 많진 않다.

머 의도한건 아니었지만 델프트에 오니 지난 유학동안의 시간들을 돌이켜보게된다.
델프트에서의 유학은 건축적으로만 봤을때도 물론 나에게 무척이나 인상깊은 시간들이었다.
누구나 본인이 공부하고 머물렀던 곳에 대한 아늑함과 향수가  있기 마련이다.
거기다 그것이 시간이 좀 지나서의 회상이라면 그것은 더욱 미화되어,
아름답고 긍정적인 기억으로 남아있을 것임이 분명하다.

나에게 역시도 그렇다.
물론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많은 좌절도 있었지만, 그 고통의 시간만큼이
미화되어 나에게 다가오는 것 같다

사실 이런 글은 학교를 막 졸업했을때, 혹은 학교를 다니고 있는 중에 쓰는 것이
적합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야 더욱 생생하고 와닿는 얘기들을 쓸 수 있을테니까.
따라서 지금의 나는 이 델프트공대를 이야기 하기엔 적합하지 않은듯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오는 기차에서 떠올리고자 했을때 떠오르는 것을 몇가지 적어보고자 한다. 더 늦기전에.

델프트공대의 가장 좋은 점중에 하나라면 다양한 성격의 트랙이 함께 공존한다는 것이다.
쉽게 얘기하면 하이퍼바디(Hyperbody)와 같이 컴퓨터스크립팅을 기본으로 한 스튜이오에서부터
전통적인 디자인 방법론을 기본으로 하는 디자인 스튜디오까지,
또한 공공건물, 집합주거 처럼 전통적인 건축의 프로그램들을 주제로 하는 스튜디오부터 재료, 혹은 고층 빌딩,
친환경빌딩을 프로그램으로 하는 스튜디오까지 매우 다양한 스튜디오가 다양한 주제와 방법론을 갖고 개설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본인의 관심과 목적에 맞는 스튜디오를 2년동안 계획을 하고 조합을 해서 스튜디오를 들을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전혀 다른 성격과 주제를 갖고 있는 스튜디오들이 어떻게 프로젝트를 진행하는지도 학기내내 동시적으로
옆에서 보고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이에더해 각각의 다른 스튜디오들 사이의 일명'융합'이 때때로 이루어지는 것을 체험하는 것은
학생에게는 금같은 기회라고 할 수 있다.


두번째는 스튜디오 진행내내 건축 디자인과 동시에 구조와 재료등 디자인이 실체화 되는데 필요한 모든 조건과 지식들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설령 구조, 디테일 잡지에서 보고 베끼는 한이 있더라도) 디자인뿐만이 아닌 좀더 입체적인 관점에서
건축에 대해 공부하고 관심을 기울이려는 자세를 갖고자 노력하게 된다.

이러한 시스템은 학부에서부터 이루어지는데 그로인해 학생들은 건축을 그림이 아닌 현실속에 존재하는 '장' 으로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많은 오픈렉쳐와 관련 시설등등은 다른 좋은 학교들도 그러할테니 언급할 필요는 없을 듯 하다.

여기까지가 좀 공식적인 얘기였다면
개인적인 기억으로 좀더 들어가보면 이렇다.

지금돌이켜봤을때 기억에 남는 것중 하나는 스튜디오동안 튜터가 언제나
강조한 것이 평범한 것, 기존에 하고있는 방식말고 다른, 재밌는, 기존에 있지않은 것을 시도해보라는 것이었다
이는 비단 디자인의 형태뿐만이 아니라 구조방식이며 재료사용이며
내가 알고있던 '이런형태에는 이런구조면 혹은 이런재료면 일반적으로 되겠네' 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의심하라는 것이었다.
즉, 디자인초기부터 구조 및 재료, 거기다 프리젠테이션 하는 방법에 까지
모든 기존의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을 의심하고 다른것, 재밌는것 을 찾을것을
끊임없이 강조하였다.

다른 기억은, 공간을 만들어 냄에 있어, 아니 공간을 탐구하는데에 있어
굉장히 열린 방법과 진지한 마음으로 접근한다는 것이다.
네덜란드건축은 적어도 나에게는 유학을 오기전에는 굉장히 표현적이고 형태적이며
자극적인 건축처럼 보였다. 잡지를 통해서 본 느낌이 그랬다는 것이다.
하지만 와서 느꼈던 네덜란드 건축은 흥미진진한 표현과 형태들 속에서 언제나
기본을 먼저 강조하고, 순수한 공간자체에 대한 탐구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언제나 재미(fun)을 놓치지 않는다.


들었던 스튜디오중에, 혹은 옆방에서 했던 스튜디오를 구경한 것중에선
면과 선등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 부터 시작해 그들의 접기, 구부리기, 그리고 조합등의 변형을 통해, 
각종 재료의 물성을 분석하고 이미지화를 하는 것을 통해, 라이노에서 만들어지는 자유 3D 형태의 조합 및 변형을 통해, 
도시의 모든 각종 현상을 분석하고 형태화 시키는 것 등등을 통해 의도하지 않았던, 손으로 쉽게 그려지지 않는 그런 공간들을
탐구하고 찾아내고자 다양한 시도를 한다.


때로는 일차적으로 '어떻게 저 주제에서 공간적인 요소를 발전시킬수 있을까' 하고 
당황스러울때도 있었지만 결국엔 진지한 탐구와 분석 그리고 재구성을 통해
그안에서 새로운 공간의 가능성과 퀄리티(quality)를 찾아낸다.
나름 당시엔 매우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들에서 끊임없이 싸울것을 요구한다.
싸움이라는 표현이 우리말중에서 가장 적합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학교를 다니는 내내 자기 자신과, 자신의 디자인과,
그리고 튜터와 끊임없는 싸움이 필요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음… 글을 시작할때는 이보단 더 쓸수 있을 것 같았는데 더 이상 적당한게 떠오르진 않는다.
또한 쓰고보니 델프트(Delft) 에서 공부하신 다른 분들께서 보시고 틀렸다고 하시는건 아닌지 걱정되기도 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그것도 무척이나 미화되었음이 분명한 기억을 가지고 쓴 것임을 밝혀둔다.


다만 분명한 것은 델프트에서의 2년간의 치열했던 단련과정들은 학부때 갈망하던
욕구들을 일정부분 만족시켜 주었을 뿐만 아니라 나를 진지하고 겸손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몇몇밤에 흘렸던 눈물을 기억하리.


끝으로 오늘 델프트에서 시간을 내 주신 형님들, 친구들 그리고 동생들에게 감사함을 전한다.
그리고 지금은 한국에, 또 세계의 다른 곳에서 일하고 있는 함께 델프트에서의 시간을 나누었던 분들에게도.



아, 여기 일본의 건축 잡지인 A+U의 2012년 신년호에
TUDelft를 중심으로 네덜란드 건축교육에 대한 에세이가 있어서 소개한다
내가 쓰지 못한 좀더 객관적인 자료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scanned by 권영민



120116 Y




 
회사를 나왔다.

처음 JYA blog에 글을 쓰기 시작할 때부터 생각해왔던 순간이자, 가장 먼저 쓰고 싶었던 문장이었다.
지난 여름부터 가졌던 많은 생각들,
이미 앞에서 글로 남겼던,
생각의 타래들을 끊어버리고 
아직 일과가 끝나지 않은 오후에 회사를 나왔다. 

만5년. 숫자로만 세어보면 오래도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만
돌이켜보면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듯 하다.

그 5년동안 같이 지내왔던 회사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1시간정도면 인사를 다 드릴것 같았는데, 다시 자리에 앉고 보니 3시간이 훌쩍 지났다.

많은 사람들중 몇가지 상황들을 소개한다.

#1. 
모든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얘기하는 말중에 '경기도 어려운데 어찌...'
나도 그렇게 들었고, 그 사람들도 그렇게 들었고,
신문에서도 떠들고, 대통령도 떠들고, 유럽도 그렇다고 하고, 미국도 어렵다고 하고...
그러면 아.. 정말 경기가 어려운가 보구나. 보구나. 보구나. 
하지만, 과연 경기가 좋았던 적은 얼마나 있었을까.
IMF이전? 아니면 지난 금융위기 이전?
그 때 당시도 모두들 지금은 경기가 호황이다라고 했을까.
어렵다고 하지만, 아직도 도시에는 크레인이 올라가고 가림막이 처져있고
누군가는 먹고 살고 있다는 것.
겪어보지 않고서는 속단할 수 없다.
꼭 겪어봐야 아는가? 라는 질문에는 
그럼 이제 호황이니 어서 독립해라 라고 그 때 말해줄건가?  라고 답하고 싶다.

#2.
인사드렸던 몇 분 중에는 개인사무소를 운영했거나, 준비하다가 포기했던 분들이 계셨다.
그 분들의 표정과 눈빛은
큰 회사 조직에 몸담았던 사람들과는 조금은 남달랐다.
뭔가 여러 감정이 교차하는, 복잡하고 애잔함?
그들이 겪었던 힘든 길과 고민들이 떠올랐으리라.
결국은 잘 하라고, 대신 잘 하라고 많은 격려를 주신다.

#3.
입사할때부터 실장님으로 계셨던 (다녔던 회사에서 실장급은 타사무소의 본부장급이다)
어제까지도 소속 실의 상무님으로 계셨던 분과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하고 싶은 말 없냐고 해서...
저 나가고 좋은 기회가 있으면 같이 일했으면 좋겠다
그러니
이제 밑에서 일하다가 나가니까 같이 일하는 관계가 되버렸군
큰 건 따서 외주를 주는 상상을 해본다... 크허허

#4.
1층 데스크에 경비 및 관리로 일하시는 분.
야간근무에 '타로점'으로 유명하다. 
회사사람들 알게모르게 1/3넘게는 봤을게다.
지난 주 인사드리고 타로점 봐달라고 부탁드렸더니
야간근무때 찾아오라고 하시는군.
세 장을 뽑았다.
여기서 세세히 말하기는 뭣하지만,
나 자신, 큰 조직에 길들여진 나 자신을 바꾸는게 중요하다 나왔다.
그 말을 와잎에게 전하니
그런 말은 나도 하겠다 하신다.
^^


이제 다시 시작이군. 앞으로의 뜨거운 5년을 위하여.

120201. J.

 
지난 2주 동안 많이 바빴다.
나는 곧 회사를 나올 몸이지만, 맡고 있던 프로젝트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지난달 쯤 팀장님께 먼저 내 거취에 대해 말씀드릴적만 해도 이렇게 바쁘진 않았는데,
팀에게 미안한 감이 많다.

그리고 이 2주동안
회사와 주변에 나의 행동에 대해 알렸다.

같이 일하는 팀원들, 프로젝트 총괄하는 부장님, 입사를 했을 적부터 줄곧 내가 속한 실의 실장님으로 계셨던
상무님께도 모두 알렸다.

동기들, 그동안 여러 프로젝트를 거치며 같이 일 했던 동료, 후배, 팀장님들.

그리고 가족들, 친척들에게도 대부분 알렸다.

반응은 ...

부럽다 / 용기가 대단하다 / 집에서 허락해준게 더 대단해다 -_-; / 잘 해봐라 / 실무를 좀 더 하고 하지 그러냐 / 
일은 어떻게 시작할거냐 / 라이센스는 어떻할거냐 / 사업하려면 이런저런거 잘 챙겨야 한다 / 사기꾼 많다 / 
일 한다음에 돈은 잘 받을 수 있겠냐 / 동업하는 친구랑 잘 해야한다 / 사무실은 어쩔거냐 / 
지금 가지고 있는 맘을 잊지 말아라 /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와도 잘 참아내라 / 하다가 안되면 다시 돌아와라 /

위의 적은것들 말고도 많다.

상대방들의 반응에 크게 동요되고 싶지 않아도, 상대방의 칭찬에는 어깨가 들썩이고, 걱정에는 주눅이 든다.
하지만, 
아직도 겪지 않고, 무슨 일이 생길지 직접 부딪히며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주변의 반응에 대해서 최대한 초연하고자 한다.

 그리고 오늘 대전에 장인어른한테 많은 이야기를 들었는데,
마지막 한 마디만 가슴에 담고자 한다.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구경꾼이다, 주인공은 너희들이다" 

그들의 걱정이 나에 대한 기대와 우려를 나타내는 것일 뿐 결국은 헤쳐가는 것은 Y와 나 이 둘이라는 것을
다시금 마음속에 새긴다. 

20120114 - J 
지난번 글에서 언급했듯 이번에는 프로젝트 만들기에 대해서 써보려고 한다
사실 이 부분은 독립을 하려고 준비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지금까지도 가장
어려운 부분이라 여겨진다.
당연한 것이다. 현재 사무소를 운영하고 계신 기존의 건축가 분들도 평생 해야하는
고민인데 새로 시작하는 젊은 건축가들에겐 오죽하겠는가.

이 프로젝트에 관련된 부분은 사실 긴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무슨 프로젝트를 실제로 만들어 낸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를 위한 특별한 노하우를 알고 있는것도 아니기 때문에
선뜻 주제로 꺼내쓰기가 어려웠다.

다만 이번 한국방문시 생겼던 몇가지 뜻하지 않은 소식들을 들으며
느낀 것을 바탕으로 project 라는 주제를 이쯤에서 한번쯤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선 염두해 두어야 할것이
첫째는 미안하게도 이 글에선 몇몇 프로젝트의 구체적인 이름은 밝히지 못할 것 같다
이유는 일단 그 일들은 '아직' 우리것이 아니다.
따라서 미리 밝히는 것은 'Potential client' 에게도
실례가 될 수 있으며 그러다 우리 그거 안주면 안되니까.. ㅎ
아마도, 바라건데, 마음속으론 확신에차서, 언젠가 그 프로젝트들이 우리것이 되어
결과가 나올때쯤에는 다시한번 그 뒤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할 기회가 올것이다.

두번째는 이곳에 쓸 내용들이 결코 새롭거나 특별한 방법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부자도 아니고 흔히 얘기하는 배경이 좋은 것도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이란 것은 대부분의 젊은 건축가들이 독립을 위해서 밟아나갈 거라 예상되는
길이었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쓰는 이 글들이 의미가 있는 거겠지만.
어쨌든 그런 이유로 이 글에선 이런 예측가능한 방법들이 정말 가능하구나 라는걸 확인하는데에 초점을 맞추면
되는 것이고 그걸 통해 나두 할수 있겠는걸 하고 주변을 둘러보는 계기가 되고 독립을 위한 의지를 다지는데에
도움이 된다면 그걸로 만족스러울듯 하다

우선 첫번째 project(?) 라 불릴만한건 지난 봄에 내가 출장겸해서 한국에
들어갔을때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J 를 비롯한 몇몇 대학졸업동기들끼리 만나 술을 먹다가 건축가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얘기를 했다. 재미없게도.
그러다 건축가로서의 사회적 역할을, 우리가 가진 재능을 통해, 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좀더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고 얘기가 흘러갔다.
즉, 마음만 갖고 있어서는, 우리가 좀더 내공이 쌓이면 해보자 머 이런 마음으로는 평생가도 변명거리만
달라질 뿐이지 뒤로 미루는건 똑같다는 것이다.

자 그럼 어떻게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냐.
항상 여기가 어렵다. 어떻게라는 단계로 넘어가면 그곳에서부턴 행동력의 문제이고
그건 많은 에너지와 시간의 소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때 J 가 말했다.
본인이 한 NGO 단체에 아는 사람이 있으니 (정말 누군지만 아는 사람, 얼굴도 모르는, 만나본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한번 연락을 해보겠단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어처구니가 없는 생각이었다.
개인적으로 당시의 나의 생각을 고백해 표현하자면 이렇다.
"무식하면 용감하다"
난 당시 그 NGO 단체가 그렇게 큰 단체인지도 몰랐고 그저 몇명 안되는 단체인줄 알았다.
그래서 우리가 건축가인데, 재능기부의 차원에서 일을 해'주'겠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머가 있겠어? 라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을 했던 거다. (참고로 그 NGO 단체는 한국에서 가장 네임벨류있는 단체 중 하나이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보낸 제안서 하나에서 이 모든 일은 시작되었다.
'이 모든 일'이라는 의미는 그 project 가 진행이 되면서 우리의 독립이 예상보다 빨라졌다는 것이다.

반응은 생각보다 빠르고 적극적이었다.
특히나 내부에서 변화를 바라고 있던 분들이 적극적으로 호응을 해주셨다.
그래서 여름에 다시 한국에 들어가 오픈 프리젠테이션을 하고
이후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는듯..... 했다.
그렇게 작년 11월초까지 주중에는 사무실일을하고 주말에는 한국일을 하면서
정신없고 바쁘고, 그치만 매우 흥미로운 시간들을 보냈다.

이때쯤에 우리들 마음속에는 독립을 하고싶다, 아니 독립을 해야겠다 라는 생각이 스물스물 올라오고 있었다.
당시의 프로젝트는 NGO 단체에서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결코 돈이 되는 프로젝트는 아니었다.
다만 30세대 전후의 집합주거 단지를 만드는 것이라는게 매우 매력적이었다.
더군다나 한해하고 끝나는 것이 아닌 매년 새로운 장소에 지어지는 것이기때문에
그 프로젝트를 통해 우리나라의 편향적이고 왜곡되보이는 주거문화에 새로운 제안을 해봐야겠다는
장기적인 희망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네덜란드에서 일을 하면서 한국의 프로젝트를 동시에 한다는 것에 매우 커다란 제약이 있었다.
모든 프로세스가 매우 느릴수 밖에 없었고, 건축은 만나서 협의와 토론을 통해 이루어지고, 설득하고, 진행해 나가도
잘 될까 말까한데 이러한 물리적 상황에서는 그런 과정들이 거의 되지가 않았다.
그래서 이 프로젝트를 잘 하기 위해서는 한국에 들어가야 겠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여기 그 당시에 J 가 나에게 보낸 메일중에 한 대목을 소개한다
당시 독립이라는, 생각보다 이른, 거대한 사건 앞에서 한 가정의 가장으로 그가 했던 고민이 여실히 묻어난다


".......중략

나 아직 100% 맘을 못 정했다.

사무실을 운영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극히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있겠지만, 시간이 지나고 서로간에 피로가 쌓이면

그 수준은 언제 어떻게 변화할지 모른다.

충분히 이해하리라 믿는다.

나는...

우리가 뭘 먹고 살아갈지 걱정이다.

회사에서 던져준 밥만 먹고 5년간 살아온 나로서는 몇가지 대안이 생각이 안난다.

....... 중략"                                               
                                                                                                                      2011년 2월 18일 email 중에서


하지만 이렇게 우리의 걱정과 설레임과 포부를 안고 진행되던 프로젝트는 결국 엎어지고 말았다

어느 단체에나 변화를 거부하고 자신의 손에 쥔 작은것에 연연해서 전전긍긍하는 답답한 위인들은
있는 법이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위인들이 항상 결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어쨌든 결론이 그렇게 나고 나서 우리는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다가
결국 저거 하나 엎어졌다고 주저앉아버리면 쪽팔리니까 그냥 우리하려던 데로 독립하자!
라고 결론을 냈다.

그렇게 결론을 내고나니 당장 독립하고 정말 머하지 하는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그 고민은 매우 깊고 심오해서 밤에도 그 걱정에 잠을 못이룰 정도였다.
 
그래서 우선 내 주변에 건물을 지을 만한 분들이 없는지 알아보기 시작했다.

자 어떤가?
우리도 어쨌든 좀 돌아오긴 했지만 결국엔 많은 건축가분들이 독립하면서 그러했듯이
결국 가까운 분들, 주변분들에게서 먼저 일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엔 이 방법을 그리 탐탁치 않아했다.
독립하고자 하는데 방법적인 면에서 전혀 독립적이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즈음엔 이 방법이 사실은 가장 현실적이면서 유일한 방법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최근들어 전혀 모르는 분을 소개받아 프로젝트에 대해 얘기를 나눠본적이 있었다.
집을 짓고싶어 하시는 분이었다.
하지만 그분은 우리가 젊은 건축가인것도 좋고 다른 조건들은 다 괜찮았지만
지어진 건물이 아직 없다는 것을 무척이나 걱정스러워하셨다.
그 분에겐 평생 업적의 결과물 중 하나가 될 집을 우리의 실험용으로 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좀 더 오기가 생기기도 했지만
이미 마음을 정하신 것 같아 설득하는 것은 그만 두었다.

그런 의미에서 처음이라는, 지어진 건물이 아직 없다는 단점을 이해해주실수 있는
주변분들을 통해서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것이 현실성 있는 대안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프로젝트를 만든다 는 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주변에 아는 사람들, 그 아는 사람들의 아는 사람들에게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소개를 의뢰하고,
물어보고, 설득하고, 찾아갔다.
말하건데 나는 무척이나 뻔뻔한 사람이다.
교수님도 뵙고, 아는 소장님들도 뵙고.

이때 중요한 것은 내가 독립할거라는거, 그래서 우리가 프로젝트를 찾고 있다는 걸
주변사람들에게 최대한 공개를 하는 것이다. 최대한 접점이 생길만한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다.
물론 절대 비굴해서는 안된다.
처음 독립하는 젊은 건축가들로서 '비록 프로젝트는 없지만 자존심과 실력은 있다' 라는 
자존감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마저 없으면 무엇으로 우리자신을 다른사람에게 일명 '세일즈' 할수 있겠는가 
'혹시 일이 있으면 우리가 해주겠다' 라는 자세를 잃지 않아야 한다. 허허허 -_ -;

어쨌든 그렇게 해서 찾던 중 프로젝트가 하나 들어왔다.
1층(혹은 2층)까지 상가를 두어 세를 놓고 그 위로는 가정집을 두는 건물이다.

그러던 중 지난번에 같이 일을 진행했던 NGO 단체의 분들에게서도 전시와 관련된 제안이 들어왔다.

그러다가 또 그때 NGO 일을 함께 진행 하면서 알게된 다른 분에게서 또 다른 매우 흥미로운 제안이 들어왔다.

그러다가 또 J 의 아는 분을 통해서 약간 종교적인 성향을 띤, 또 다른 제안이 들어왔다.

그러다가 또, 사무실을 같이 쓸 분을 구하던 중, 인테리어 디자인과 시공을 함께 해보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그러다가 또, .....

어떤가. 아직 사무실을 준비중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벌써 이 만큼이나(우리에겐 이만큼이나다) 가지고
시작을 하게 되었다.
이 외에도 아직 가능성만을 가진, 시간이 좀더 걸릴거 같은 몇몇 프로젝트들이 더 있다. 
물론 이 것들이 모두 다 성사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저런 가능성들을 많이 가지고 있을수록 성사될 가능성 또한 많아 지는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이런 가능성들을 하나하나 구슬꿰듯이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 진정한 재미 아니겠는가.

여기서 한가지 말하고 싶은 것이 이것이다
위에서 나열한 프로젝트들 중에선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결과로 나타난 일들이 몇개 있다.
예를 들어,  처음 시작했던 NGO 단체의 프로젝트는 그저 하룻밤에 써서 보낸 이메일한통에서 시작되었고,
그 프로젝트를 하면서 그안에서 일하시는 몇몇 사람들을 알게되었고, 본래 의도했던 프로젝트가 엎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분들을 통해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프로젝트들이 우리에게 돌아왔다.
이 또한 모두 성사될 수도 있고 안될수도 있지만 그 과정에서 또 어떤, 우리가 예상치 못했던, 일들이 일어날지 모른다.
너무나 흥미진진하다.

생각보다 모든것이 매우 진지한것에서 시작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앞서 얘기했듯이 적극적이기만 하다면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벌어질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단계는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저 프로젝트들을 완성도 있게, 우리의 이야기를 담아 완성해 내는 것이다
그리고 믿는다. 그 완성된 씨앗은 또 다른 재미있는 열매들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거라고.
작은 눈덩이를 조심조심굴려서 차츰차츰 큰 눈덩이로 만들어 가듯이,
이제 독립을 준비하는 젊은 건축가들에게는 작은 프로젝트를 하나하나 조심조심 굴려서 자꾸자꾸 키워가려는 자세가
생존을 위한 유일하면서, 중요한 자세인거 같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사람이 중요하고, 적극적인 자세가 중요하며, 긍정적인 마음이 있어야 하고, 끝으로 자존감을 지켜야 한다.
그럼 프로젝트는 만들어 질거라고 믿는다

이 이야기들이 1년쯤 뒤에도 유효해서 우리의 방법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면 하는 바램이다

120105 Y






 

독립을 위해서 필요한 것들 중
그 동안의 글들에서 얘기한 자기 자신에 대한 문제들 이외에도
물리적인 것들이 필요한데 그 중 가장 중요한게
사무실 아닐까 싶은데
일단 고정지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기에 (일단, 각자의 인건비는 논외로...;;;)

오늘 크리스마스 이브... 연인들과 가족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야만 할 것 같은 날
집에 하루종일 덩그라니 남겨진 탓에
점심만 먹고 집을 나섬. 화이트 크리스마스구나...

사무소를 구하는 가이드라인을 정하고 복덕방을 돌아보기로 했는데

 1. 보증금, 임대료는 1000에 50이하로 - 이정도가 최대 한계치...
 2. 위치는 강북 - 강북에서도 동네에 시간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으로,
                         강남을 안하는 이유는? 강남의 오피스 숲은 여력도 없거니와, 이미 수년간 질리게 봐온 덕에
 3. 굳이 사무실이 아니어도 주거용으로 나온 원룸도 같이 알아보기

이정도가 생각해 놓은 것인데, 
이것 말고도
 4. 교통접근성 - 협력업체 또는 클라이언트를 위한
 5. 건축사무소간 공동 사무실

하지만, 당장 클라이언트가 찾아올 일도 당장 흔치 않을 것 같고, 협력업체야 초반 킥오프 미팅하고 전화로 협업을 진행한다면
굳이 매달 몇십만원을 꼴아박으면서 목 좋은데 자리잡고 있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함.
그리고 건축사사무소간 공동 사무실은 아직 결정된 사항이 아니라, 일단은 개별적으로 생각중
2~3개 사무소가 공동 사용하고, 관리/운영비 분담한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있을까...
비용 문제 뿐아니라, 정보공유나 서로간의 자극제로서의 역할 등 하지만 역시 좀 더 무르익어야할 상황이므로... 패쓰.

일단 오늘은 대충 가격대랑 물건을 둘러보는 겸해서 큰 부담 없이 나섬

이런저런 생각으로 정한곳이 성북동.
지난 여름 길상사를 둘러보기 위해 다니던 성북동 길은
높은 담장과 으리으리한 주택들로 인한 위화감만 빼자면
동네 분위기나 주변 환경은 나무랄대가 없다고 생각함

다행히 성북동 한 구석, 길상사 가는 길목에
연립주택 1층 원룸이 비어있다는 소식에 한달음에 달려가 둘러보고.
Y가 오케이만 한다면 난 괜찮다고 생각함

가격도 생각보다 괜찮고 ^^  
동네분위기도 카페나, 갤러리, 오래되어 보이는 성당이 주변에 보이고,

밥집이나, 생활을 위한 가게들은 없어보였지만, 한성대에서 걸어 올라오는 길에 해결할 수 있으리라 보고
어차피 밥도 자체해결할 생각이므로.

여기 말고도, 한성대 입구쪽 사무실, 약수역 인근 원룸을 둘러봤지만
여러면에서 부족.
가장 큰게 역시 월세.

조금씩 윤곽이 보이니,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 누그러진 모양새다

집에 돌아와 혹시 근처에 건축가가 살고 있나 지도 검색해보니
주대관교수님의 엑토건축이 우리보다 더 깊숙히 자리잡고 있음.
양평 집짓기할때 처음 뵈었었는데 성북동에 작업실이 있었군.


- 20121225 J,  Merry Christmas! 
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에 들어온지 이제 2주가 다 되간다.

이제 한 일주일반정도가 남았다

한국에 들어오기 전에 우연히 ANM studio의 김희준 소장님 블로그를 통해 연락을 드렸고
와서 머무는 동안 뵙고자 문의를 드렸더니 흔쾌히 시간을 내 주셨다.

장소는 신사동 가로수길.
본래 이곳에 사무실이 있었는데 지금은 여러 사정상 이전을 준비하고 계신관계로 어쨌든
가로수길에서 보기로 했다

가로수길이라는 장소가 언제부터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는지 난 잘 모르겠다
내가 무딘 탓인지, 아니면 본래 비싼동네는 출입을 잘 안해서 그런지 바로 강건너 왕십리에
있을때는 잘 몰랐다가 네덜란드 가서 인터넷 매체를 통해 오히려 더 많이 듣게 되었다.

가로수길.
처음가봤지만 미디어를 통해 접했던것 만큼 흥미롭진 않았다.
다만 거의 20미터 마다 하나씩 있는 cafe 들이 얼마전 신문기사에서 읽은
'대한민국은 커피공화국' 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감하게 해 주었다.

어쨌든 그렇게 가로수길을 한시간 정도 배회하다가 한 cafe에서
소장님을 만났다.

소장님은 의외로 격식이 없으신 분이었고 나와같이 걸죽한 X설 을 즐겨 사용하시는
와일드한 분이셨다.... 라는게 내 개인적인 느낌이다.
좀더 소상하게 묘사를 해 보자면 이런 표현이 적당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현대사회의, 현대 한국 건축구조의 울타리나 정해진 길을 벗어나 오롯이 13여년의 시간동안
거친 들판에서만 살아오신, 아니 생존해 오신 야수의 기운을 뿜어내는 건축가.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내가 짧은 만남동안 그 모든 이야기들을 다 들을 수는 없었지만
내가 만나 본 건축가분들 중에, 적어도 한국의 건축가분들 중에선
가장 용감하게 맨몸으로 모든걸 받아, 견뎌오시고 철처하게 본인의 의지와 능력으로 살아오신
분이라고 생각한다.

말로는 자세히 하지 않으셨지만 그 동안 겪어온 수많은 어려움과 좌절, 도전, 성취 등등
그간의 찬란했던 시간들이 내공으로 쌓여 몸에 베여있는것이 느껴졌다.

독립을 준비하고 있는 내게 말로는
"이 정신못차리는 놈" 이라고 자꾸 말은 하셨지만
그렇게 말씀하시는 말투에는 왠지 모를 애정과 기특함이 묻어 있는듯 했다

물론 내가 이렇게 말씀드리자
"말을 곧이 곧대로 들으란 말이야" 라고 하시긴 했지만.

김희준 소장님의 지난 시간을 자세히 이곳에 쓰기는 힘들지만
놀라운 건 만 28살에, 그것도 IMF 가 닥친 1998년에, 학부를 졸업하고 경력 2년의 배경이
다 인 상태에서 건축시장이라는 거친 들판으로 뛰쳐 나오셔서 지금까지 살아남으신 그 이력.
그리고 이제 한번 더 도약을 준비하고 계시다는 그 눈빛과 자신감.
사실 이런것들도 무척이나 인상적이었지만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동안 대부분의 프로젝트를 디자인부터 시공관리까지 혼자서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프로젝트의 규모와 완성도가 굉장히 훌륭하다는 것이다.

처음으로 내가 김희준 소장님을 뵙고싶어한 이유도 홈페이지에서 본 프로젝트의 완성도나 디자인이
매우 흥미로워서 이기는 했지만 그 모든걸 거의 혼자서 하셨다는 것에 사실 놀랬다.
이분은 진짜였다.

김희준 소장님이 비록 나에게 말로써 이런저런 격려나 충고도(혹은 정신 못 차린다는 야유도) 많이 해주셨지만
지금 현재 소장님이 보여주신 그 지난 행적들 자체가 독립을 준비하는 젊은 건축가들에게
훌륭한 격려이고 표상이며 희망이라고 나는 감히 생각했다.
돈이나 빽이 아닌 오로지 실력만으로 하나를 만들고 그 하나가 다른 프로젝트를 불러오고...
많은 독립을 꿈꾸는 젊은 건축가들이 가질 수 밖에 없는 생존의 프로세스가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여기에 몇가지 구체적인 소장님의 얘기를 정리를 해보면
나에게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하셨다.
바로 '너는 너고 나는 나이다' 라는 것이다.

이것이 먼 말인고 하니 다른 유명한, 주변의 좀 잘나간다 싶은
건축가들을 신경쓰지말고 '너는 니꺼 하는거고 나는 내꺼 하는거다' 라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좀더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너무 남에꺼, 혹은 남의 충고를 신경쓰다가 갈길조차 잃어버리지 말고
내꺼를, 내 건축이야기를 꾸준히 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것은 '내 건축이야기' 이고 이를 '꾸준히' 하는 것이다.
이게 유행하면 이거하고 저게 좋아보이면 저거 하고 하는 게 아니라 당장 눈에 보이진 않더라도
내 건축을 이야기 하라는 의미이다. 그러다 보면 그것이 장기적으로 나에게 다른 기회들을 열어줄 것이라고 하셨다.
두번째는 천천히 가더라도 '꾸준히' 할 각오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소장님 표현을 빌리자면 '막 뛰어가다가 또랑에서 엎어져서 넘어져 버리는게 아니라' 꾸준히 가는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이셨다,

이쯤에서 나는 엠비씨의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이 생각이 났다.
7명의 가수들이 경쟁을 한다. 그 각각의 가수는 비록 현재 가요계를 지배하는 사람들은 아니다.
하지만 각자는 각자의 스타일을 갖고 있고 그걸 좋아해주는 매니아, 즉 그들만의 팬층이 존재한다.
그들은 평생을 각자의 장르적 영역성을 갖고 활동해 왔으며, 자신만의 그 무기와 내공을 가지고
'나는 가수다' 라는 무대에서 경쟁을 한다.
누군간 그저 매회 그들을 순서매기기에 큰 의미를 두고 보지만,
그들은 실은 각자의 '내꺼'를 가지고 격돌을 하는 것이다.
나는 그런 '내꺼'를 가진 가수들을 보며 소름이 돋은 적이 있었다.

오늘 소장님이 말씀해주시는 것도 그런 '내꺼'를 가지라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건축가라 불리는 우리도 일렬로 줄세워 등수를 매길수 없는 것이 분명하고 그래서도 안되는 것인데
우리는 앞에있는, 혹은 유명한, 잘 나가는 그들을 따라 가고자 하기도 한다.

하지만 후에 우리것을 좋아해주는 사람들이 있는, 누군가와 경쟁할 수 있는, 내껄 꺼내보여줄 수 있는
건축가가 되기 위해서는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려 하고 보여주려 하여야 한다.
그것이 독립을 준비하는 젊은 건축가들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우리는 일단 가진게 '자신감' 과 스스로도 염려될만큼의 '우직함 (혹은 무모함)'이니 일단은 좋은 출발이지 않은가.

김희준 소장님이 현재 얼마나 행복하신지, 건축가로 살아오신 지난 13여년의 시간에 얼마나 만족스러워하시는지는 모르겠다.
안여쭤보았다.
만약 만족스러워 하신다면 한편으론 허탈한 마음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약 10여년후에 독립한 건축가로서 살아남아 있다면 어떤 마음일까 몹시나 궁금했다.

다만 짐작컨데 지난 시간동안 즐거우셨으리라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말처럼 행복은 성공을 해서 행복한게 아니라 성공까지 가는 그 길에 행복이 있다고 나도 생각한다.
이 말은 다시 말해 그 길이 행복하다면 그게 곧 성공이라는 의미도 될 것이다.

10년후, 20년후에 어느정도의 경제적, 사회적 부와 명예를 얻느냐가 성공과 행복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것이 아닐 것이다.
그랬다면 나는 이 길에 들어설 필요가 없다.
상상만 해봐도 얼마나 허탈할지 짐작이 가기 때문이다.

나에겐 그 10년, 20년동안, 아니 그 이상으로 오랫동안 과정을 즐기며 행복한게 중요하다.


끝으로 다시한번 바쁜시간 내주신 김희준 소장님께 감사드리며
중간에 오셔서 좋은 말씀 해주시고 저녁까시 사주신 이로재의 정효원실장님께도 감사드립니다.


111221 Y

 



벨기에의 Aalter 는 작은 도시이고 이곳에는 현재 학교가 3곳이 있다.
이 프로젝트는 이 세개의 학교를 하나로 합치는 것이었다.
이에 더해 학교에는 기존의 학교가 하던 지역공동체를 위한 공공공간의 역활을 강조, 확대하는 프로그램이 삽입되었다.
그런 이유로 이 프로젝트는 Aalter 지역주민 전체의 관심사가 되었고
그들에게 본인들의 자녀들이 다닐 학교에 대한, 그리고 자신들 또한 이용할 이 건축물은 매우 중요한 관심의 대상 일수 밖에
없는것은 어찌보면 당연했다.
따라서 그들은 건축가를 불러서 설명을 듣기를 요청했고, 건축가, 학교관계자, 학교주민들로 이루어진 미팅을 통해
적극적으로 그들의 의견을 제시하였다.
또한 일부 주민들은 사무소로 프로젝트에 대한 의견, 감상, 감사의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그런이유로 컴피티션당시에 만들어 올렸던 짧은 film 을 도시주민들이 열심히 찾아보고 학교 홈페이지에도 띄워놨단다.

그들의 이러한 관심과 열의는 건축가를 흥분시킨다.
그래서 이렇게 크리스마스 선물이랍시고 여분의 에너지를 써서 짧은 영상을 만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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