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국을 한주 앞두고 바젤을 찾았다.
근 4년가까이 유럽에 있는동안
4번의 스위스 여행을 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건 두번째로 스위스를 찾았을때 였는데
당시엔 차를 빌려서 했기 때문에 다른 세번에 비해 훨씬 더 자유로운 여행을 할수 있었다
따라서 일정이나 교통편에 완전히 구속되지 않고 말그대로
길이 있는 곳을 따라 여행을 했다.
그 알수 없는 길들은 지도나 여행책자에는 나와있지 않은
스위스의 알수없는 마을들로 나를 인도하였고
나는 비로소 진짜 스위스의 삶을 만날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보여주는 모습과 풍경들은
단언코 '적어도 스위스에서' 만큼은 유명한 현대건축물들을 만날때보다도
더 감동스러웠다.
하지만 그들이 나에게 보여준건 단순히
'더 이상 이보다 더 아름다울수 없을 것 같은 자연과 인간의 삶의 조화를 체험하는데서 오는 감동'
이상의 무엇이 있었다.
순전히 건축을 여전히 배우고 있는 나같은 사람에게
그것은 스위스 현대건축가들의 작품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한 단서들이었다.
그들이 사용하는 건축언어, 재료의 물성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 공간에서 느껴지는 담백함.
결코 이러한 감각들은 어느날 갑자기 천재같은 건축가들에 의해 하늘에서 뚝! 하고 떨어지듯이 만들어진게
아니다.
그것들은 그들이 어려을때부터 삶을 통해 언제나 함께 해온 그들의 전통의로서의 삶과 건축이
자연스럽게 그들속에 축적되어 자연스럽게 현대적인 모습으로 표출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왜 Peter zumter는, 왜 헤르조그 앤 드뮤론은 혹은 어떻게 저들은 저런 건물을 잘 만들까
라는 질문들에 대한 답은 스위스의 숨겨진 마을들을 찾는 것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 쯤에서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돌이켜보지 않을 수 없다
과연 나에게는 어린시절부터 나와 함께 나이들어온 전통과 생활을 담아내는 공간이 무엇일까?
다행이 시골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나에게는 아파트가 아닌 주택이, 거실이 아닌 안방, 부엌, 사랑채로 둘러쌓인
마당이, 그리고 소파가 아닌 대청마루와 안방의 옷장뒤에 숨겨져있던 비밀스런 다락방에 대한 기억과 몸이 기억하고
있는 공간들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내 머리와 손에 깃들어서 건축으로써 투영되어 지지는 못하고 있다.
좀더 넓게 보면 산업화와 도시화 속에서 단절되어 버린 우리의 유산이 못내 아쉽다.
이것은 결코 전통을 살리자, 한옥을 살려서 현대건축에 적용해야 된다 라고 말하고 싶은게 아니다
그럴수도 있고 안 그럴수도 있지만,
내가 느끼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과거와 우리가 가진 유무형의 유산에 대한 이해는 분명
우리를, 그리고 우리의 건축을 더욱 깊이 있게 만들어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시작하는 우리로서는 마음 한구석에 간직하고 유심히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우리의 얘깃거리라고 생각한다.
유럽에서의 '당분간' 은 마지막 여행이 될 바젤여행이 끝났다.
120125 Y
근 한달만에 글을 올리게 되었다.
이 글도 벌써 써논지가 한달은 되어버린 글인데 이제서야 이렇게 올린다
보통을 글을 올리기 전에 최소한 오타체크의 이유에서라도 한번은 읽어보는데
이번엔 그러지 않았다
지난밤에 쓴 연애편지가 다음날 아침에 읽으면 유치찬란한 3류시처럼 되버리듯이
왠지 지금 읽으면 블로그에 포스팅을 하지 못할만큼 유치하게 느껴질거 같아서이다.
그저 저 순간에 저 감정을 그대로 이곳에 올리는게 맞을거 같다.
한 달은 지난듯 하다. 매일 아침 사람이 그득찬 지하철을 비집고 들어간지가 아득하다.
그런데 아직 1주일도 지나지 않았다. 지난 주 화요일에 마지막 인사를 하고 나왔으니...
1주일도 안된 시간 동안 사무소 개업준비하랴, 건축주도 만나랴, 건축사 학원도 다니랴 정신이 하나도 없다.
이러한 부분의 시행착오들과 절차들은 곧 정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리라 본다.
그 전에, 지난 5년을 글로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이대로 새로운 일을 시작하다보면, 그 5년이 퇴색되어 버릴 것 같다.
그 시간동안 모두 즐겁고 행복하지는 않았지만, 이대로 기억의 수면밑으로 가라앉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
...
포스코센터.
입사할 무렵의 회사는 이 곳 17층에 자리하고 있었다.
포스코센터의 로비는 얼마전 가보았을 때에도 역시나 감동적이다. 설계는 90년대초반, 완공은 95년.
그러나, 현재에도 한 드라마의 배경으로 쓰일 정도로 로비와 아트리움의 공간감은 시대에 뒤떨어져 있지 않고
현재진행형이다.
그 넓은 로비는 포스코센터가 건립당시 건폐율 관련해 문제가 있었지만, 공공보행의 단서를 달고 허가가 났다는
비하인드 스토리. 이제는 어느 곳에서도 이러한 대규모 로비를 만들 수도, 만들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단순히 넓은 공간으로 두지 않고, 단체자원봉사, 바자회, 공연, 전시 등 정말 다양하고 요긴하게
사용된다. 변화무쌍한 공간 이용의 모습을 사진에 담고자 틈틈이 찍어두었던 사진들은 어디에 있는지... -_ -
이 곳 17층에서 야근을 할 때 바라보았던 테헤란로의 모습 또한 그럴 듯한다.
이 시기는 건축이라는 특정한 대상보다는 사회생활 자체를 즐겼다.
그리고 사무실에서는 보고서 참 많이도 썼다. 사무실은 팀제가 아닌 풀제 즉, 프로젝트에 따라서 팀이 새로 구성되고
해체되는 시스템이라 어느 프로젝트든 막내.
보고서, 사례조사 간간이 3D 모델링.
물론 이런 것이 필요없다는 건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업무를 하는 능력 또한 쉽게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학교에서 생각한 건축과 사무실에서 진행되는 건축 그리고 내가 맡아서 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한 괴리감은
지금 돌아보면 눈을 질끈 감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현상 설계를 했다.
이번 현상 설계는 턴키 2개 보고서, 홍보물 맡아서 한 뒤에
지루한 개발 제안서 작업을 하던 차에 제대로 팀을 짜서 시작하는 프로젝트. 남은 기간은 3주.
시간이 많지 않다. 넌 보고서 잘 하니까 보고서 해.
보고서 맡았다.
작업을 하면서도 익숙하게 보고서 목업을 잡고 레이아웃을 잡아가는 모습이 그리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마무리 작업을 하고, 출력하고 제출.
떨어졌다.
그래도 별로 슬프지 않다. 내 것같지가 않으니까. 나는 누군가의 도구이니.
개발 제안서 쓸 때 같이 일 했던 PM.
MXD 프로젝트 합사나가야 하는데 같이 나가자고 꼬신다.
이런 대규모 프로젝트 할 수 있는 기회가 쉽지 않다고 한다.
공동주택 1500세대, 50층짜리 오피스, 20~30층짜리 주상복합 등.
합사 나갔다.
이런 프로젝트를 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다는 것은 프로젝트 진행이 어렵다는 말과 동의어였다. -_ -;
발주처가 민간이다보니 특별한 사유 없이 밀어지기 일쑤. 그렇다고 설계사가 나설 수도 없는 상황.
설상가상으로 부동산 시장이 침체. 금융위기다 뭐다 여건이 악화되면서 사업성 떨어지고...
그러면서 1년 반이 지났다.
그 동안 합사는 선릉에서 안양 범계역 근처로 옮겼다.
설계를 할 수 있는 기회는 점점더 없어졌다.
엑셀과 파워포인트를 화면에 띄우는 날이 많아졌다.
그래도
상대적으로 남는 시간을 활용해 LEED AP 자격증 땄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면 안될 것 같은 맘이 들어서 도전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뭔가 대단한 것 같았지만 2~3개월지나니 약발이 떨어져갔다.
그러다 프로젝트 무기한 홀딩
빈손으로 본사 복귀.
이제는 4년차 대리.
하지만 머릿속은 텅
무언가 트레이싱 페이퍼에 그림을 그리는게 어색해졌다.
그러던중 포스코에서 발주한 포항제철소/광양제철소 실내체육관.
설계랑 시공이랑 같이 한다는 '디자인빌드' 프로젝트
난 광양제철소 실내체육관 팀.
PM은 서울건축 출신, 40대에 IIT로 훌쩍떠나서 학업 마치고 그 해 입국한 인물.
법규검토 좀 도와달라고 발을 들이며 시작한 프로젝트
약 7개월간 평일11시퇴근. 주말 이틀중 하루는 출근.
발주처나 설계사나 둘다 경쟁적으로 공기단축 외치며 쥐어짜는데
도면치는 설계팀하고 땅파고 공그리치는 시공팀하고 죽을맛.
그런데...
내가 참여했을 때 계획설계 마치고 바로 기본+실시설계 시작하려는 타이밍
PM은 뭐 할줄 아냐?
그 동안 경험이 미천하여 할 줄 아는 것은 보고서나 모델링, 하지만 가르켜주면 열심히 하겠다.
그 때부터 도면 한장한장 배우기 시작함.
동시에...
경영위치 출신 대리형님한테 한수 두수 아니 그 이상을 배움. 배운다기보다 흡입
그리고 나를 멍하게 만들었던 말.
디자인은 니가 생각했던 매스를 만지고 입면을 그리는 것 말고도
공간 안에서 너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 너의 수많은 선택들이 공간을 만들어간다.
첨엔 뭣도 모르고 그냥 도면이나 쳐야지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경영위치 소장님도 서울건축 출신. PM도 서울건축 출신
그 대리형님도 서울건축의 계파라고 해야하나
여튼 여기 들은 내용 PM도 같이 얘기하니 그렇다고 해야지
이렇게 7개월갈 죽을똥 말똥 하고 나니 눈이 좀 트인다.
이제 5년차. 선배들이 보면 가소로워보이겠지만, 나로서는 굉장한 변화의 계기였다.
이제 실내체육관은 마감공사와 조경공사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는데,
턴키 팀으로 호출.
안양에 무슨 인연이 있는지 다시 안양으로 합사.
팀별 역할 분담.
보고서 담당... -_ -;
내가 그동안 회사에서 쌓아온 이미지 덕이겠지.
그래도 초반 계획안 잡을 때 머리 짜내면서 아이디어 회의에 임했지만,
프로젝트 나가리. ;;;;
다시 본사 복귀.
여수 엑스포 포스코 기업관 프로젝트 참여
파빌리온이다보니 외형이 둥글둥글 조약돌 같아, 그걸 구현하는게 제일 큰 과제
같은 팀이었던 M은 라이노를 귀신같이 다루는 인물.
나는 라이노 초짜.
나는 대신 예전의 기억을 살려 도면 열심히 그리려고 했는데
건축/구조 통외주
그래야 실행예산이 마이나스가 되지 않는다고 하는데...
우리 팀 3명은 보고,관리,3D조형 구축 등.
뭔가 심심하다. 프로젝트를 진행해도 손에 잡히지를 않는다.
이 때즘 Y와의 작당이 시작되고,
여름 한달을 새로운 프로젝트 구상에 써버리고,
그러던 중
현상설계 투입.
팀에서 버림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해 의구심이 있는 터라
그래 이거라도 잘 해보자.
그런데 공동주택 현상.
잘 됐다. Y와의 작당 프로젝트도 주거. 하다보니 건축에서 가장 근간이 되는것이
사람이 살아가는 집인데. 이 사무실은 주거랑 인연이 별로 없는 곳이라
접할 기회가 없었는데,
비록 주거형태가 왜곡되어가는 정점에 선 것이 공동주택이라지만,
그 만큼 변화무쌍하게 거주자의 욕구를 충족시켜가는 괴물같은 존재.
현상설계 또 3주정도 남고,
손이 모자라 이것 저것 닥치는대로 그리고, 모델링하고, 도집 만들고... 하다보니
당선.
우와.
현상설계 끝나고 다시 여수 팀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했는데
당선되면서 바로 프로젝트 팀 구성되고 팀원으로 들어감
공동주택 진행하면서
주요 포인트도 알게되고, 도면보는 법도 익히게 되고,
한국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아직까지는) 주거 형태의 여러 단면들에 대해
느끼고 익힐 수 있는 좋은 기회.
이것을 극복하고 새로운 주거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나와 Y의 목표.
그리고 공동주택 한참 쭉 진행되는 동안 결심.
나가야 겠다.
나가서 직접 해봐야 겠다.
그리고 다시 새해
1월8일 만 5년, 6년차 설계 직원에서
현재는 5년제출신, 만 5년 실무경력을 가진, 그리고 건축가가 되기 위한 큰 발돋움을 시작하려는
순간.
...
...
다시 시작이다!
120207 J
회사를 나왔다.
처음 JYA blog에 글을 쓰기 시작할 때부터 생각해왔던 순간이자, 가장 먼저 쓰고 싶었던 문장이었다.
지난 여름부터 가졌던 많은 생각들,
이미 앞에서 글로 남겼던,
생각의 타래들을 끊어버리고
아직 일과가 끝나지 않은 오후에 회사를 나왔다.
만5년. 숫자로만 세어보면 오래도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만
돌이켜보면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듯 하다.
그 5년동안 같이 지내왔던 회사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1시간정도면 인사를 다 드릴것 같았는데, 다시 자리에 앉고 보니 3시간이 훌쩍 지났다.
많은 사람들중 몇가지 상황들을 소개한다.
#1.
모든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얘기하는 말중에 '경기도 어려운데 어찌...'
나도 그렇게 들었고, 그 사람들도 그렇게 들었고,
신문에서도 떠들고, 대통령도 떠들고, 유럽도 그렇다고 하고, 미국도 어렵다고 하고...
그러면 아.. 정말 경기가 어려운가 보구나. 보구나. 보구나.
하지만, 과연 경기가 좋았던 적은 얼마나 있었을까.
IMF이전? 아니면 지난 금융위기 이전?
그 때 당시도 모두들 지금은 경기가 호황이다라고 했을까.
어렵다고 하지만, 아직도 도시에는 크레인이 올라가고 가림막이 처져있고
누군가는 먹고 살고 있다는 것.
겪어보지 않고서는 속단할 수 없다.
꼭 겪어봐야 아는가? 라는 질문에는
그럼 이제 호황이니 어서 독립해라 라고 그 때 말해줄건가? 라고 답하고 싶다.
#2.
인사드렸던 몇 분 중에는 개인사무소를 운영했거나, 준비하다가 포기했던 분들이 계셨다.
그 분들의 표정과 눈빛은
큰 회사 조직에 몸담았던 사람들과는 조금은 남달랐다.
뭔가 여러 감정이 교차하는, 복잡하고 애잔함?
그들이 겪었던 힘든 길과 고민들이 떠올랐으리라.
결국은 잘 하라고, 대신 잘 하라고 많은 격려를 주신다.
#3.
입사할때부터 실장님으로 계셨던 (다녔던 회사에서 실장급은 타사무소의 본부장급이다)
어제까지도 소속 실의 상무님으로 계셨던 분과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하고 싶은 말 없냐고 해서...
저 나가고 좋은 기회가 있으면 같이 일했으면 좋겠다
그러니
이제 밑에서 일하다가 나가니까 같이 일하는 관계가 되버렸군
큰 건 따서 외주를 주는 상상을 해본다... 크허허
#4.
1층 데스크에 경비 및 관리로 일하시는 분.
야간근무에 '타로점'으로 유명하다.
회사사람들 알게모르게 1/3넘게는 봤을게다.
지난 주 인사드리고 타로점 봐달라고 부탁드렸더니
야간근무때 찾아오라고 하시는군.
세 장을 뽑았다.
여기서 세세히 말하기는 뭣하지만,
나 자신, 큰 조직에 길들여진 나 자신을 바꾸는게 중요하다 나왔다.
그 말을 와잎에게 전하니
그런 말은 나도 하겠다 하신다.
^^
이제 다시 시작이군. 앞으로의 뜨거운 5년을 위하여.
120201. J.
한국에서 돌아왔다.
돌아와서 약 일주일정도 사무실에 나갔다.
한국에 가기전에 하고 있던 프로젝트들을 정리를 했고
그 사이에 중간중간 개인적인 일들을 보러 다니기도 했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정리해야 할 것들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중 하나가 사무소와의 관계가 아닌가 싶다.
나같은 경우엔 조금 복잡한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우선 나에게 가장 중요했던 이슈는 VMX에서 우리사무소에 대해
한국파트너로서의 역할을 제안했다는 것이다.
쉽게 얘기하면 VMX 한국 사무소를 해보는게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게 되면 일정 금액을 투자를 하는 것일테고
(혹은 우리는 일정의 월급을 받으면서 일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로서는 좀더 안정적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얘기는 현재의 우리로서는 굉장히 부담되는 제안이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이 공짜로, 혹은 그저 나와의 정을 생각해 그런 제안을 할리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얘기는 가능성만을 남겨둔체 후에 적당한 때가 되면 다시 논의하기로 했다.
다만 나에겐 '가능성'을 열어두는게 중요하고,
VMX 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분명 우리가 갖지 못한 능력과 노하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무엇보다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나에겐 나를 끊임없이 자극시켜줄 수 있는 다양한 '자극들'이 중요한데
VMX는 분명 나에게 가장 중요한 자극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어쨌든 내가 일하던, 배우던, 나를 잘 알고, 나를 자극시켜 줄 (좋은 방식으로건, 혹은
나쁜 방식으로건) 사무소와 관계를 잘 변경하고 정립시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고맙게도 다음주 주말에 송별회를 겸한 파티가 있다.
VMX 에서의 마지막 공식적인 일정이 될 것이다.
섭섭하고 고맙다.
120106 Y
지난 2주 동안 많이 바빴다.
나는 곧 회사를 나올 몸이지만, 맡고 있던 프로젝트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지난달 쯤 팀장님께 먼저 내 거취에 대해 말씀드릴적만 해도 이렇게 바쁘진 않았는데,
팀에게 미안한 감이 많다.
그리고 이 2주동안
회사와 주변에 나의 행동에 대해 알렸다.
같이 일하는 팀원들, 프로젝트 총괄하는 부장님, 입사를 했을 적부터 줄곧 내가 속한 실의 실장님으로 계셨던
상무님께도 모두 알렸다.
동기들, 그동안 여러 프로젝트를 거치며 같이 일 했던 동료, 후배, 팀장님들.
그리고 가족들, 친척들에게도 대부분 알렸다.
반응은 ...
부럽다 / 용기가 대단하다 / 집에서 허락해준게 더 대단해다 -_-; / 잘 해봐라 / 실무를 좀 더 하고 하지 그러냐 /
일은 어떻게 시작할거냐 / 라이센스는 어떻할거냐 / 사업하려면 이런저런거 잘 챙겨야 한다 / 사기꾼 많다 /
일 한다음에 돈은 잘 받을 수 있겠냐 / 동업하는 친구랑 잘 해야한다 / 사무실은 어쩔거냐 /
지금 가지고 있는 맘을 잊지 말아라 /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와도 잘 참아내라 / 하다가 안되면 다시 돌아와라 /
위의 적은것들 말고도 많다.
상대방들의 반응에 크게 동요되고 싶지 않아도, 상대방의 칭찬에는 어깨가 들썩이고, 걱정에는 주눅이 든다.
하지만,
아직도 겪지 않고, 무슨 일이 생길지 직접 부딪히며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주변의 반응에 대해서 최대한 초연하고자 한다.
그리고 오늘 대전에 장인어른한테 많은 이야기를 들었는데,
마지막 한 마디만 가슴에 담고자 한다.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구경꾼이다, 주인공은 너희들이다"
그들의 걱정이 나에 대한 기대와 우려를 나타내는 것일 뿐 결국은 헤쳐가는 것은 Y와 나 이 둘이라는 것을
다시금 마음속에 새긴다.
20120114 - 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