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년이라고는 하는데... 

기억속에선 언제부터 그녀가 있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안납니다.

 

그냥 늘 있었던 것 같고, 앞으로도 있을 것 같은 수연이가 

안식년 휴가를 갔습니다. 

 

만 3년이 되면 보내주기로 했던 한달의 휴가와 특별휴가비를(ㅋㅋ 자랑~ㅋ)

타이밍만 보다가 4년이 다 되가는 시점에서야 이제 가네요.

그 동안 사무실의 어려운 프로젝트, 남이 하다 가버린 프로젝트 등

꼬인 일이 있을때마다 묵묵히 매듭을 풀어주던 든든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최근 몸도 안좋아지고, 휴식도 필요해 보였습니다.

 

아무튼 그녀가 없는 사이, 모두가 조금씩 더 으쌰으쌰해서 잘 버텨내보겠습니다.

그러다 보면 충전된 그녀가 태양빛을 등지며 짠 하고 곧 돌아올겁니다.

마치 간달프처럼요 ㅋㅋ

 

우는 줄 알았죠?
그녀가 우는건 절대 아닙니다..사실 제가...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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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앞의 일부내용은 '건축가로 독립하기 : 3장 '성장하기'_ 직영공사 1' 에서 올렸던 글을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한꺼번에 읽는게 조금이나마 흐름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해서 입니다.

 

사무실을 시작하고 첫 건축 프로젝트였던 강진의 지역아동센터와 벌교 뽁이집은 원치 않았 직영공사 였다. 

 왜 이 프로젝트들이 직영공사로 진행될 수 밖에 없었는지는 다른 여러 에서 설명을 하기도 고, 

대략 상황만으로도 추측 가능 하시리라 다. 어쨌든 그 이후로도 의  Low Cost House 프로젝트들을

직영공사처럼 진행을 했다. 엄밀히 하자면 "반 직영" 도였다고 할  지만 어쨌든 늘 현장 가까이에 있었다.

그리고 지막으로 했던 "반 직영공사" 가 부암동 House 였다. 여기서 "반 직영"이란 시공을 시공사가 아닌

시공팀 정도와 함께 하면서 돈 관리를 리가 하고, 현장 관리는 그 시공팀의 반장님께 약간의 자율이 어지는

그런, 지금 생각해보면 참 복잡하면서도 체계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했다는 의미이다.

어쨌든 그러다보니 여러가지 우여곡절끝에 정말 사무실이 개업하자마자 금전적으로 파산일보 직전까지 가는 참사와 

덕분에 현장에서  페인트칠을 하고 을 파야하는 보람된(?) 상황을 마주하게 었었다.

낮에 현장에서 일하고 오후에 사무실로 돌아와 사무실 장실에서 매일 샤워하는 눈물나 들이 있었다.

그 후 다시는 직영공사를 하지 않으리라 마음 먹었다. 

 

사실 직영공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척 매력적이다. 

히나 개인적으로 현장에서 하나하나 만들어져가는 을 보며 흥분하는 사람에게는 더 그렇다. 

라서  언급한 그런 경제적, 체적 고됨은 그 기쁨에 하면 할 것도 아니다.

다만 그런 고됨보다 더 로운 것은 로 공사가 끝나고 나서다.

공사란 모름지기 끝나고 나서 몇  잔손 수 밖에 없는 것이라고 누군가가 그런 것처럼 끝나고 나서도

자잘한 (로는 !) 하자들이 생한다. 공사를 한다는 것은 끝나고 나서 발생하는 제들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시공사에서는 이런 것들에 대응할 수 있는 인력도 있고, 그 만큼의 이윤도 적에 있을테고, 무엇보다

하자보수도 무의 하나이다 보니 어렵지 않게 대처할 수 있겠지만 우리에게는 그것이 무척이나 괴롭고 어려운 일이었다.

기본적으로 공사에서 이윤이 지 않아서 였기도 하고, 그럴만한 인력이 없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들었던 것은

프로젝트가 끝났는데도 끝나지가 않는다는 것이다.

한정된 인력으로 로운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하자보는 데에 에너지를 으니 사무소가 앞으로 나아가질 못한다는 

느낌이었다. 직영공사란, 특히 건축공사는,  좀 더 경험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마음만 있다고 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 후 사무소의 대부분 프로젝트들은 시공사를 해 진행이 되었고, 우리는 그저 직영공사 하듯이 리를 나갔다. 

시공사들과 작업을 하며 은 것을 배웠다. 그 중에선 정말 장인과도 은 시공사도 있었고, 처음엔 작은 시공사였는데 

같이 일하면서 같이 장해가는 듯한 시공사도 있었고, 눈에 보이는 마감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기본적인 기능에 더

집중하는 시공사도 있었다. 이렇듯 서로 다른 장단점을 고 있지만, 시공사들은 어쨌든 전문가이다. 

시공에 관한한 사무소 컴퓨터 앞에  리로 생각한 우리보다는 훨씬더 현실적이고 물리적이다.

따라서 시공사를 단순히 건축가의 지시를 이행하다는 집단이 아니라, 또 다른 파트너이자 전문가로서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 하우를 공유하려고 노력해 다.

그 과정에서 여러 시공사로부터 서로 다른 점들을 배울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늘 현장에서 느끼는 아쉬움들이 있었다.  

정말 이 작업에 이 정도 금액이 들어갈까?, 공사 순서대로 차근차근 하면 될텐데 왜 순서를 뒤죽박죽해서 일을

복잡하게 할까? 왜 다음 공정에서의 작업 내용을 미리 고려해서 작업해 지 않아서, 뒤에 가서 시공을 하게 만들까?

마감에 대해 고민을 하면서 작업을 해야 되는데 왜 그렇지 못할까? 왜 이렇게 현장은 지저분 한가?

왜 건축주와의 의사소통이 명하고 원활하지 못할까? 등 의 금증과 아쉬움들이 마음속에 있었다.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과거의 힘들었던 기억들을 다 는 거 같다.

우리가 직접하면 저런 부분들은 더 잘 할 수 있을거 같은데 하는 건방진 생각들이 자꾸 불쑥불쑥 들었다. 

그러던 차에 마침 몇 개의 프로젝트를 직접 공사까지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하나는 용인 House 이고, 이는 건축 프로젝트였다. 그리고 하나는 부산의 치과인테리어 프로젝트, 

마지막 하나는 건축도 인테리어도 아닌 방배동 한 주택의 마당을 Remodeling 하는 프로젝트 였다. 

이 프로젝트들에 대해 다른 얘기를 하기 전에, 

혹시 결과적으로 직영공사를 다시 또 할거냐고 누군가가 물어본다면 지금으로선 다시 하고 싶진 않다. 

물론 어떤 사무실들은 인테리어공사들을 직접하면서 잘 운영하고 있다. 그런 관점에서보면 어쩌면 우리의 경험이 

단편적이고 또한 역량이 부족해서 일 수도 있다. 다만 몇 번의 직영공사를 하면서 개인적으로 느낀 것은 우리에게 

무엇이 더 중요하고, 우리가 무엇을 더 잘할 수 있는지, 또 우리가 무엇을 더 하고 싶은지를 다시금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용인 House, 부산의 치과인테리어, 방배동 리모델링의 프로젝트들에서 느끼고 겪은 것은 앞서 겪었던 것들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비슷한 문제와 비슷한 즐거움이 반복 되었다. 

우선 가장 큰 문제는 공사비를 넉넉하게 잡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물론 건축주가 예산이 넉넉하지 못한 상황도 있었지만, 

또 하나는 우리가 전문 시공사도 아니고, 공사하는 과정에서 부족한 부분도 많을텐데, 경험도 부족한 우리가 공사를 통해

이윤을 가져가는 것에 대해 약간의 거부감이 있었다. 

여기에 더해 시공사를 보며 늘 공사비 라는 것을 투명하게 운영하는 것에 대한 갈증이 있었고, 이를 통해 건축주와 

신뢰를 쌓아보고 싶었다. 그렇게 된다면, 즉 건축주와 우리가 모두 돈에 대한 신뢰가 생긴다면, 공사하면서 발생하는

예상치 못한 비용들에 대해서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공사를 하다 보면 거의 매 공정마다 

늘 생각하지 못했던, 눈에 보이지 않는 비용들이 발생하고, 작성한 견적서보다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드는 공정은 거의 없었다. 

견적서를 작업자분들께 받은 금액 그대로 반영을 해 놓다보니, 조그마한 변동에도 대처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런 상황들을 건축주가 일일이 다 이해하느냐 하면 사실 그렇지도 않았다. 건축주는 어쨌든 어떤 방식으로

견적서가 작성되었는지, 어떤 사유로 추가금액이 발생했는지를 다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처음 준 견적서 이외의 금액이

나오는 것을 불편해 할 뿐이다. 나름 대로는 시작하면서 설명을 했다고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건축주가 이해한 것은 그렇지 않았나 보다.

 

그러다보니 현장에서 건축주의 조그마한 요구사항이나 불평도 부담스러워지고, 현장에서 벌어지는 돌발상황들이 모두 스트레스가

되어 돌아왔다이것은 공사가 끝나고 나서도 마찬가지다. 입주 이후에 생기는 크고 작은 하자들에 대해 연락이 오는 것

그 자체로 모두 스트레스고 이는 정신적, 경제적으로 사무실을 너무 힘들게 하였다.

 

이런 상황을 다시금 반복해서 겪으면서 지금 겪고 있는 이 스트레스가 과연 생산적인가 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어떤 때는 직영 공사로 인해 겪는 경제적 스트레스, 건축주와의 사이에서 생기는 갈등들이 정신을 지배하고, 

그로 인해 정작 우리가 해야하는 설계에 집중하지 못하는 순간들이 많아졌다.  

설계를 고민하는 시간을 즐겨야 하는데, 어떤 때는 마음이 파괴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직영공사가 주는 매력은 여전하다. 도면이 아닌 현장에서 작업자와 직접 소통하며 만들어 내는 하나하나는

이런 경우가 아니면 느껴 볼 수 없는 건축의 또 다른 즐거움이자 쾌락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때는 여전히 설계를 하고 있을 때이고, 우리가 늘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

그래서 더 나아지고 싶다고 늘 갈망하는 것 또한 건축설계이다.  따라서 직영공사라는 것이

이러한 우리의 즐거움과 나아감에 있어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면 우리는 직영공사를 앞으로는 그만 두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건축가가 현장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사무실 컴퓨터의 모니터 안에서 그려지는 도면이 현장에서 작업자들의

손에 의해 어떻게 만들어 지는지를, 각 재료가 어떤 가능성과 한계가 있는지를  아는 것은 건축의 또 다른 단계이고 수준이다

이 과정 안에서 또 다른 창의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직영공사는 배울 것이 많다.

물론 어떤 분들은 우리와 달리 직영공사를 통해 돈을 벌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공사를 직접한다는 것은 다른 의미에서 많은 책임을 지는 것이다. 현장에서 벌어지는 많은 것들을 최종적으로는

결정해야 하고그 경제적 물리적 책임도 고스란히 혼자 져야 한다. 

그리고 그 중에는 그다지 생산적이지 않은 일들도 많은 것이 현실이다. 

 

글 끝에 더해서 작년 초에 멀리 김해에서 했던 직영공사로 인해 지금까지도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다.

자세한 얘기를 지금 쓸 순 없지만, 처음에는 받지 못한 돈으로 인한 금전적인 손실이 고통이었다.

하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니, 우리 나름대로는 건축주의 여러 어려운 상황들에 최대한 맞춰보려

돈을 나중에 주겠다는 약속만 믿고 공사를 진행했는데, 그런 마음에 대한 배신을 생각하니 

그 인간 자체에 대한 미움이 훨씬 더 괴로웠다. 시간이 지나면 처음에 크게 와 닿던 돈의 문제는 

조금씩 조금씩 해결되어 가는 거지만, 그 마음속에 생기는 증오는 시간이 지날 수록 커져갔다.

서로가 모든게 만족스러울 순 없는 거겠지만,

우리는 언제나처럼 진정을 다 했고, 그 진정성과 노력에 대해

부정당하고, 한편으론 이용당했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속 화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 증오가 나의 손끝과 머리속을 침식해 들어오는 느낌을 받았다.

순식간에 돌변한 그 태도에 어떻게 하면 복수 할 수 있을까가 머릿속에서 하루종일 맴돌기도 했다.

결국 이 증오가 나를 망가트리는 느낌을 받았고, 그것이 내가 감추고 싶다고 해서 감추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주변으로부터 깨달았다. 

그리고 고맙게도 조소장이 함께 짐을 나누어 가져가주면서 그 증오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었다.

혼자가 아닌 둘이 라는 것에 진심으로 감사한 계기이며, 시간들이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이러한 직영공사를 통해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하면서,

또한 아주 익스트림한 일들을 겪으며 우리가 한정된 능력과 에너지로 

무엇에 더 집중해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고민을 모아야하는 지를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지금 보내고 있는 이 일상의 시간에 대한 감사함을 배웠다. 

어쩌면 그것이 직영공사를 통해 얻은 가장 값진 보상인지 모르겠다.

 

Y

 

 

 

   




 

부끄럽습니다.

횟수로 6년이 넘는 기간동안 수십개의 현장들을 감리를 다니며 

저는 물론이고 직원들에게도 안전모를 쓰게 할 생각을 못했습니다.

몇번 현장에 있는 안전모를 써보긴 했지만 역시나 불편하고, 자꾸 삐뚤어지고, 

그러다보니 이러면 오히려 신경쓰여서 더 위험하겠는데? 라는 합리화를 하며 결국 벗어던져버리곤 했습니다.

 

얼마 전 현장에서 작업하시던 분이 사고를 당했습니다.

그분도 안전모만 쓰고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큽니다.

본인이 얼마나 주의하느냐와 상관없이 때로는 불가항력적으로 다칠 수 있는 곳이 현장인데 

어쩌면 그동안 우리 현장에서, 제가 혹은 저희 직원들이 다치지 않은 것이 정말 운이 좋았던 거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생각해보니 등짝이 오싹 할 일입니다.

 

그래서 사무실 로고가 들어간 안전모를 주문했습니다.

앞으로 불편하고, 때로는 좀 챙피하더라도(오늘 저걸 들고 지하철을 타고 간 정팀장처럼요 ㅋㅋ;;)

저도 그렇고, 우리 직원들도 그렇고 열심히 쓰고 다니게 해보려고 합니다.

처음엔 좀 불편하겠지만 익숙해 지겠죠.

 

늘 시간이 지나면 점점 희미해져가는게 기억인데,

불편함이 지금의 이 각오보다 더 크게 다가오지 않도록, 

서로서로가 자꾸 인식시켜줘야할 것 같습니다.

 

오늘 용인까지 들고가 첫 개시를 한 정팀장, 수고했어! ㅎ

(끝으로 현장에서 다치신 희0형님, 언능 일어나셔서 다시 현장에 복귀하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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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매년 꾸준히 오던 동아대 학생인턴에 더해 올해는 경남대에서도 한 명이 방학을 이용한 인턴을 시작했습니다.

이 먼곳까지 인턴을 하러 오는게 안타깝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하지만

암튼 더운 여름, 사무실의 살벌함으로 싸~하게 더위를 피할 수 있을거라 기대 및 장담하며...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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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청림동 나눔센터가 긴 소개글과 함께 "건축과 도시공간" 에 소개되었습니다.

 

건축과 도시공간은

건축도시공간연구소(auric)에서 공공에 초점을 맞춘 프로젝트와 정책 등을 소개하는 건축도시정책 전문저널 입니다.

 

그래서 포항 나눔센터 프로젝트가 이 저널에 소개되어, 

무료급식소라는 프로그램의 공공성에 대해 다시한번 고민하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저희 역시도 그 지점에 의미를 두고 싶습니다.

 

내가 건축을 얼마나 오랫동안 배워왔는지를 따져보면

시작이 대학교부터이니 계산해보면 부끄럽지만 거의 20년 가까이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결과로서 내 손에 잡히는 무엇인가가 있는가?

혹은 어느 수준에 도달했다고 말 할 수 있는가? 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어찌된게 전혀 그렇지가 않다.

 

다만 어쨌든 숫자로 따져 20년 가까이,

그 과정으로 보자면, 대학교, 유학, 외국살이, 사무실 개소 후 실무 라는

다양한 과정들을 겪어오며 내가 얻은 것들을 다 잘라내고 가장 밑바닥의 딱 한마다로 하자면

'건축에 정해진 답은 없다' 라는, 초등학생도 알만한, 결론을 진심으로 믿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는 건축에 정해진 맞고 틀리고의 절대적 기준도 없으며,

그래서 맞고 틀린 방법론이라는 것도 없다는 것이고,

설령 과거에 작동하던 방법론도 지금 유효하다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건축설계에 있어 결과보다는

그 과정에서 새로운 생각을 하려고 노력해야 하고,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와 조건들이 무엇인지 세심히 살펴야 하며,

그 과정이 일관된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는지를 스스로 계속 확인해 봐야 한다

고 생각한다.

이런 과정들을 통해 여러 요소들을 고려해, 생각을 구축하는 훈련을 하는 것이고,

그 생각을 흩트리지 않고 한 방향으로 발전시켜 결국 건축이라는 형태로 이어지게 하는

과정이 결국 설계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이 과정에서 누가 더 혁신적인 생각을 구축하느냐가 결국 다름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

 

그런 측면에서 나의 대학교때를 돌이켜보면 설계수업을 들으며 

가장 아쉬움이 남았던 것이 바로 이런 훈련의 부족함이었던 것 같다.

교수님들의 말씀은 정답처럼 여겨졌으며, 교수님들이 주시는 피드백은

이건 틀렸고, 이건 이렇게 하는 거야, 건축은 이거다, 건축은 이런게 맞는거다 라는

결론이 대부분 이었다.

그래서 내 생각의 부족함과 발전을 고민하는 것이 아니고,

교수님들이 주시는 답에 맞춰 수정을 하며 프로젝트가 완성되었다.

모든 분들이 그랬던 건 아니었지만, 대체로 분위기는 그러했다.

 

작년부터 학교에서 4학년 학생들과 설계수업을 진행했다.

수업을 시작하면서 스스로 기준을 세웠던 것은, 그리고 학생들에게 주었던 말은

학교에서 경험할 수 있는, 그리고 경험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나의 관점을 갖고, 그 관점을 발전시켜 보는 과정을 밟아보는 것이라는 말이다.

조금 느리더라도 생각이 건축이 되는 그 과정을 하나하나 경험해 보는 것,

이것이 설령 후에 건축을 하든 안하든, 어느 일을 하든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나는 그 과정을 각자가 어떻게 전개해 나가는지에 관심을 둘 것이고,

그 과정에서 나의 의견이 맞고 틀리고의 기준이 아니고, 각자의 생각이 처음부터 끝까지

흩어지지 않고 가고 있는지, 그 과정에서 이것이 맞는지 아닌지가

모든 결정의 판단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얘기했다.  

그리되면 학생들은 도시를 분석할때부터,

그 안을 구성하는 하나하나를 우선 세심하게 살펴야 하고,

다음으로 고민해보고 판단해야하며, 

그 과정에서 또한 선택을 해야하고,

더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나열해야하며, 

그것들에 대한 본인의 관점을 결정해야한다.

그리고 나면 이를 발전시키는 과정이 필요하고,

최종적으로 건축이라는 형태와 공간으로 변이되는 과정을 겪어내야한다.

이 과정에서 모든 것이 고민의 대상이고, 모든 것이 판단의 대상이다.

스스로 결정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없다. 

정해진 지식을 전달하는 것을 피하고 싶었다

 

나도 여전히 잘 하지 못하는 것을 학생들과 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어느 순간 되면 잘해지는 것이 아니라,

건축을 하는 한 계속될 수 밖에 없는 숙명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학생들이 어려워도 시작해보길 바랬다.

나도 학생들도 서로 부족했지만 함께 어려우니 좀 낫지 않았을까?  

 

1년 반의 수업을 마치고 학교수업은 그만 두기로 했다.

한 학기든, 1 년이든 쉬었다가 돌아오시라는 말이, 빈말이라도, 감사하긴 했지만,

수업을 하는 지난 시간동안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든 시간이었다.

아무래도 사무실일에 쓰는 시간과 관심이 물리적으로 부족할 수 밖에 없었고,

그러다 보니 양쪽에서 다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래서 다시 사무실에 집중하기로 했다.

사무실에 집중해도 늘 부족하고 간당간당하니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지금이 어쩌면 사무실의 변화에 가장 중요한 순간이라고도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사무실은 언제나 그때그때가 가장 어렵고 중요한 순간이긴 했다 ㅠㅠ)

 

수업을 하는 동안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진심으로 학생들을 위하는 마음이 없으면, 

그에 대한 사명감이 있지 않으면,

학생들과 함께 하는 것이 즐겁지 않으면,

오랫동안 하기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대학시절

대단한 인내와 끈기로 포기하지 않으시고 

가르침을 주신 당시의 우리 교수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그분들께 누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살아야겠다.

 

지난 1년반의 시간동안 학생들에게 좋은 선생이었는지 돌이켜보면

아쉬움과 미안함이 크다.

작년에 수업했던 친구들이 올해 졸업작품을 하는 걸 보며,

그 성장에 뿌듯하고 설렘이 있기도 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어렵지만 얻는 보람이라는 것이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도 했다.

수업을 그만 두면서 가장 아쉬운 부분이다.

 

그 동안 좋은 기회를 주셨던 학교와 교수님들께 감사드리고,

부족하지만 함께 해준 학생들에게 또한 고맙다.

 

Y

 

우리가 사무실을 시작하고부터의 약 7년, 그 이전 약 2,3 년을 더해도 지난 약 10년의 시간은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특이했던 기간 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역사상 이런 적이 있었나 할 정도로 집이라는 것에 대한 관심이 폭발하면서

수 많은 사람들이 집을 짓는 꿈을 꾸고, 또 이를 구체화하기 시작했고,

이에 더해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집 혹은 건축에 대한 수 많은 책과 잡지가 인기를 얻으며 일반인들의 관심을

더욱 증폭시켰다.  방송에서도 또한 집 혹은 인테리어는 주요한 소재 중 하나로 다루어졌다.

이러한 현상은 일반인들의 집 혹은 거주 라는 것에 대한 생각을 조금씩 바꾸게 해 주었고,

집을 재산증식의 수단에서 원하는 삶을 위한 가장 중요한 기반으로 인식하게 해 주었다.

이에 더해 이명박, 박근혜로 이어지는 정권은 경기부양을 위해 건설을 적극 활용하였고,

그 결과로 엄청난 돈을 대출을 통해 시장에 풀기 시작했다.

일명 빚내서 집사라 라는 구호는 비단 아파트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고, 한없이 낮아지는

대출금리는 집을 지으려는 사람들, 수익을 위해 빌딩을 지으려는 꿈을 가진 사람들을 모두 건축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에 더해,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나이와 패기로 무장한 수많은 건축가들이 건축시장에 뛰어들기 시작했고,

이들은 일의 규모, 종류, 영역을 가리지 않고 그 거대한 흐름에 올라타 있었다.

(물론 여기엔 몇몇 대형사무소의 부도도 역할을 했다) 

그 결과 지난 약 10년의 시간은 소규모 건축시장의 호황 아닌 호황의 시기였고,

건축사무소는 그 규모와 형태에서 다양화 되었다.

 

하지만 2019년 올해는 어떠한가.

정확한 통계를 내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최근 여러 기회로 만나뵙고 얘기들은 사무소 소장님들을 통해 들은

내용을 바탕으로 판단해 보건데 최소한 지난 10년,

아니 작년 혹은 재작년과 비교해도 확실히 나빠졌다는 것 만은 확실한 듯 하다.

대부분의 아뜰리에들이 활동하던 민간 소규모 건축시장은 강력한 대출규제와 부동산법,

그리고 높아진 대출금리로 사실상 거의 죽었다고 표현할 정도가 되었고,

그로인해 많은 사무소들이 수주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나는 이것은 어쩌면 예견된 일이란 생각도 든다.

개인적으로 지난 약 10년간의 그 엄청난 대출과 그로인해 시장으로 풀린 돈은 표현하자면

미래에 쓸 돈들을 다 끌어모아 한 순간에 쓰게 만든 것과 마찬가리라고 생각한다.

그로인해 그 한 순간에는 건축시장이 호황처럼 보였지만, 그건 마치 모든 에너지를 

끌어모아 한 순간에 폭발시켜버리고 마는 그런 결과가 된게 아닌가.

1500조가 넘는 가게부채가 의미하는 것이 어쩌면 앞으로 다시는 지난 몇 년간 우리가 겪은 것과 같은

민간건축시장의 활성화는 경험하기 어려울 것이란 것을 의미하는 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약 10년의 시기동안 사무소를 시작하고,

그 시기를 경험한 우리는 운이 좋았다는 생각도 든다. 

소규모 건축시장만으로 사무소를 운영할 수 있을 만큼 수주를 할 수 있었고,

현재 하는 일을 충실히 하는 것 만으로 내년을 준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지난 7년과 같은 방식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느낀다.

우리 또한 이전과 비교해 확연히 줄어든 상담 건수를 통해

민간시장의 달라진 분위기를 느끼고 있고, 이는 우리에게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지난 10년은 그 이전의 소위 기성세대라 불리던 건축가들이 활동하던 시대와는 달랐다.

그 이전 기성세대 건축가들은 그래서 한때 왜 건축가들이 이런 작은 건축시장에서 활동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불만을 갖고 있었다는 얘기도 직간접적으로 들은 적도 있다. 

그들이 활동하던 시기를 기준으로 보면, 지난 10년의 시기에 수 많은 건축가들이

작은 주택, 작은 건물, 인테리어 등등을 하는 것이 탐탁치 않았을 것이고,

거대한 건축적 담론이나 건축적 철학 등을 얘기하는 않는 건축가들이 패기없어 보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에 가장 뜨거웠던 이슈가 바로 "생존" 이라는 단어 일만큼 경쟁은 녹녹치 않았고,

예전과 같이 어설픈 건축적 담론이나 철학을 얘기할만큼 건축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높이는 만만치 않았으며,

건축가를 선생님으로 부르는 시대도 아니었고, 하다못해 대형 프로젝트가 넘쳐나던 시대도 아니었다.

 

하지만 앞으로 다가올 시대는 어쩌면 지난 10년과는 또 다른 시기일 수도 있다.

지난 10년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이 행운 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만큼 더한 경쟁과 생존의 시대가 될 수도 있다.

늘 변화하고 나아져야하고, 또한 그것이 남들보다 빨라야 한다.

그러려면 그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을 만큼의 내부적 여건과 역량을 유지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렇지 못한 사무소는 어쩌면 언제든 사라질 수도 있다.

 

이런 생각들을 하면 무척 흥분된다.

한치앞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불안정하지만, 그것이 불안하면도 동시에 흥미롭기도 하다.

지금 이 시기에 집중해야하고, 이 시기에 미래를 향해 신경을 곤두세워야하고, 

변화를 채찍질해야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방식과 새로운 시장을 또한 찾아야한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걸 보여주어야 한다.

이 모든게 쉽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

 

Y

 

 

건축 디자인이 주는 가치를 당장 돌아올 수익으로 환산할 수가 있을까? 

공항대로변에 위치한 땅에 들어선 이 건물은 건축주가 처음부터 당연히 임대를 위한 목적으로 땅을 매입했다. 

따라서 건축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임대가 잘 나가는 것 이었고, 특히나 건축주는 병원들을 모아 건물을

소위 메디컬타워로 만들고 싶어했다.

다만 시작할때 이 건물의 목적에 대한 부분에서는 모두가 동의를 했지만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식에서는

서로 생각이 달랐다.우리는 기본적인 면적을 충족한다는 전제하에  공항대로에 면해 있는 건물들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을 만드는 것, 더 나아가 비슷한 상업용 근생건물과는 다른 공간구성을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즉, 우리는 기본적으로 디자인 이라는 것 자체가 브랜드가 되어야 하고, 

그 것이 결국 사람들에게 이미지로 기억에 남게 되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이 건물에 입점한 상가들의 가치도 함께 높여준다고 믿었다.

반면 건축주는 사람들에게 가장 쉽게 눈에 띄고, 기억에 남는 것은 결국 간판이라고 생각했다. 

특히나 건축주는 미리 (이 건물에 입점을 생각하고 있는 병원의) 원장들, 그리고 우리도 처음 들어봤지만

이런 종류의 상업용 근생건물을 컨설팅 해주는 사람들도 우리에게 소개해 주었다. 

이 컨설팅업체(업자)는 어떻게 해야 건물이 임대가 잘 나가는지, 

임대인들이 선호하는 조건들이 무엇인지 등등을 컨설팅해주는데,

그 내용은 주로 평면은 어떤 형태가 잘 나가고, 간판은 어떻게 설치해야 사람들에게 잘 인지되고 등등의 내용이다. 

이런 사람들과의 미팅에서 논의된 내용의 주된 결론은 결국 간판이다.

이 간판이라는 것이 어떻게 해야 규정에 저촉되지 않으면서 최대한 크게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그것을 위한 건축의 입면과 평면 구성은 어떠해야 하는가 등등이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 건물의 임대성을 높이고, 결과적으로는 건물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임대인이 선호하는 조건에 가장 충실한 건물이 임대가 잘 나가고, 그것이 곧 가치라는 것이다.

 

이러한 서로 상충되는 두 방향의 가치가 충돌할때 결국 어떻게 결론을 낼 수 있을까. 

과연 우리는 우리가 주장하는 것을 경제적 가치라는 구체적인 숫자로 증명할 수 있을까? 

이렇게 했을때 임대가 잘 나간다고 확실히 장담할 수 있을까? 아쉽지만 우리는 결국 이러한 것들을 장담할 수 없었다. 

우리의 주장을 뒷받침 할 구체적 데이터도 결국 찾지 못했다. 

어쩌면 당장 대출이자를 내야하고, 하루라도 빨리 임대를 내서 수익을 올리는 것이 중요한 건축주에게 “이미지”나 

“무형의 가치” 같은 단어들은 조금은 멀리 느껴졌을 수도 있다. 

그것보다는 당장 임대에 관심갖고 있는 병원장이 하는 말이 훨씬 더 가깝게 와 닿았을 것이다. 이해가는 측면이다.

우리가 주장하는 가치를 건축주에게 눈에 보이는 무엇인가로 설득해야 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몫이고, 

혹은 언젠가는 이러한 사례와 경험들이 쌓여서 일반적인 접근으로 받아들여질 날이 올때까지 기회가 될 때마도

증명하려는 노력을 해야할 것이다.

 

어쨌든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이 프로젝트에서 최대한 많은 부분을 건축주, 

혹은 예비임대인의 요구사항에 맞춰주려 노력했다. 

점점 작은 면적 하나하나, 숫자 하나하나가 모두 돈으로 계산되는 상황이 되어 갔고, 

그 과정에서 건축가가 제안할 수 있는 것들 또한 그런 종류의 계산법 뿐이었다. 

복잡하고 일반적이지 않은 디테일은 모두 공사비로 연결되니 이 또한 고려대상이 아니다. 

모든 것은 투입된 비용 대비 수익으로 계산되는 수익률의 지배 아래 있으니 이에 어긋나는 요소는 우선 제외된다.  

그나마 건축주가 상관하지 않는 영역이 있으니(혹은 알아채기가 어려운 부분) 그건 건물의 입면 비례 정도였다.  

전면 커튼월의 비례와 건물 전체적인 비례 등을  조정하는 것이 할 수 있는 계획의 영역이었다. 

 

특히나 전면 커튼월은 철저히 병원이 선호하는 간판방식과 크기에 대응하기 의해 결정된 입면사항이다. 

처음부터 office에서 볼 수 있는 커튼월의 입면은 기대하는 것이 아니었고, 광고내용으로 가득찰 커튼월 입면을 기대하였다.  

 

그렇게 해서 공사는 시작되었고,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OO병원 입점예정, 

혹은 O층 임대문의 등등의 광고가 건물에 붙어 있었다. 

이 건물이 도면상의 입면 그대로 세상에 보여진 건 딱 하루였다. 

건물의 공사가 다 끝나고, 준공검사를 위해 건물 외부에 붙어있던 광고를 모두 떼어낸 날, 

바로 그날이 이 건물이 입면에 아무런 광고 없이, 

우리 입장에서는 우리가 설계한 온전한 모습 그대로 세상에 존재했던 단 하루였다. 

사진도 딱 하루 허락된 바로 그날 촬영되었다. 

준공검사가 끝나고 바로 다음날 부터 미리 예정되어있던 각 층 인테리어 공사가 임대인에 의해 시작되었다. 

당연히 외부엔 OO병원 2월말 오픈 예정, 혹은 O 층 임대문의 등의 현수막이 다시 붙기 시작했다. 

상업건축의 운명이라 생각해야 할까.

다행히 현재 이 건물은 지하부터 1,2층 스타벅스, 3층부터 6층까지 나머지는 모두 병원으로 임대가 다 채워졌다. 

덕분에 이것이 임대인의 조건에 충실해서 그런건지, 건물이 대로에 면해 입지조건이 좋아서 그런건지, 

아니면 건축설계의 덕분인지, 어떤 이유가 가장 크게 작용했는지 알 수는 없다. 

디자인의 가치를 대중이 인식할 수 있는 사회가 되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특히나 건축이라는 영역은 디자인의 영역에서도 가장 보수적이고, 그 인식변화가 가장 느린 편이다. 

건축에는 단순히 멋있다 아니다를 떠나 수많은 사회적, 물리적 재원이 투입되어야 하기 때문이고, 

고려되어야 할 것이 그 만큼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복잡하게 얽혀있는 가치들 중에서 디자인을 가장 앞에 두고 판단하려면 오랜시간 좋은 디자인, 

좋은 건축, 좋은 공간을 경험해보고 그 안에서 얻는 가치를 내 생활에서 느껴보고, 

그러고 나면 그것이 긴 안목으로 경제적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아채게 될 것이다. 

어쩌면 그 때가 되면 건축가들이 늘 갖고 있는 설계비에 대한 고민 또한 자연스럽게 해결 될 수 있을지 모른다. 

따라서 그러한 시기를 맞이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좋은 건축, 좋은 디자인 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해야하고, 어떻게 그 가치를 경험하게 할 수 있을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즉, 대중과 가까워지려하는 노력과 과정이 필요하고, 우리의 생각을 대중의 생각과 맞추고 공유하려는 시도가 필요하다. 

그렇게 건축과 대중이 가까워질때 우리는 우리를 애써 열올리며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고, 

온전한 모습이 단 하루만 허락되는 상업건축의 슬픈 운명도 바뀔수 있을 것이다.  

 

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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