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정부가 출범하면서
아니, 어쩌면 새 정부가 출범할때마다
얘기하는 것이 규제완화와 비합리적 절차의 타파이다.
이번 정부도 경제활성화를 위해 불필요한 규제를 철폐하겠다고 했다.
이 공약을 들으면서 건축계에 존재하는 그 수많은 병맛같은 규제와 행정절차 등이 떠올랐다.
그리고 오늘은 마침 어제 허가를 받은 프로젝트에서
그 동안 겪은 일들이 생각났고, 이에 대해서 간단하게 써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연희동 대로변,
작은 땅에 조금 높은 건물을 짓는 프로젝트가 있다.
땅이 작아 주차대수에 한계가 있었고, 그래서 확보할 수 있는 면적에도 한계가 있었다.
대신 높이에 대한 제약은 없어서 상대적으로 높은 층고를 확보할 수 있다.
각 층에서 엘리베이터와 계단을 빼고 나면 남는 면적이 약 10평 남짓되는 작은 공간이기에
조금 높은 층고를 확보해 공간적 개방감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이에 우리는 건축물 높이에 대한 건축법의 규정을 확인하고,
담당 공무원과 협의를 거쳐 건축심의를 접수했다.
첫번째 심의였다.
심의 그 자체는 위원들이 하도 병신같은 짓을 많이 하기 때문에 자세한 얘기는 차치하고,
결과적으로 각 층의 층고를 낮춰서 조정하라는 심의 결과가 나왔다.
물론 얼마 정도로 낮추는 것이 적정하냐에 대한 규정은 없다.
그냥 심의위원 맘대로다.
어쨌든 심의결과를 반영해야 허가가 날 수 있다고 하니
일단 건축주와 상의해 심의결과에 따라 높이를 조정하기로 했다.
아쉽게도 건축주와 우리가 기대했던 공간감은 많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렇게 높이를 조정하고, 이를 담당 공무원뿐만 아니라 팀장, 과장과도 모두 합의를 했고, 다시 심의를 접수하기로 했다.
두번째 심의였다.
1차 심의결과에 따라, 건축인허가를 주관하는 공무원 전부와 협의를 마쳤으니
(99%의 경우엔) 심의통과는 당연하다고 여겼다. 우리도 건축주도.
하지만 두번째 심의에 들어온, 새로 싹 바뀐, 심의위원들이 조정한 층고를 더 낮추라는 의견을 냈다.
기준은 '그냥 좀 층고가 높아보이는데', '딴데서도 이정도 높이를 적용했는데' 정도였다.
황당한 일이다.
건축법상으로 근생의 층고에 대한 기준, 주택의 층고에 대한 기준은 없다.
그저 필요한 경우 건축물 높이에 대한 규정이 있을 뿐이다.
그 안에서 내가 주택의 층고를 3m를 쓰든 4m를 쓰든, 5m를 쓰든 그건 사용자의 자유이다.
법에도 없는, 심의위원의 개인적 의견을 가지고 이를 제약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법에도 없는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더 황당한 것은 이런 상황에 대처하는 공무원들의 행태다.
이전 심의결과를 바탕으로, 본인들과 협의했고, 법적으로도 문제가 없다고 판단해서
두번째 심의를 접수하라고 해놓고, 심의에서 이와 반하는 상황이 벌어져도
이에 대해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는다.
실제로 심의는 일종의 자문이지 법위에 존재하는 구속력을 갖지 않는다.
그럼에도 (아마도 책임회피의 이유가 가장 크겠지만)
공무원들은 이 심의결과를 절대적인 것처럼 받아들인다.
이럴 거면 머하러 우리가 사전에 인허가부서와 협의를 하고,
더 근본적으로는 법규를 들여다 보는가.
어차피 심의에서 위원들이 결정하면 그걸로 다 끝나는 걸.
공무원들 스스로 본인들을 합바지로 만드는 어처구니없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결과적으로 설계는
굴욕과 분노와 황당과 짜증을 담아
두번째 심의에 맞춰 높이를 조정해 다시 심의를 받기로 했다.
세번째 심의이다.
이렇게 해서 심의를 지나 마침내 허가를 받은 것이다.
건축주의 희망과 우리의 노력은 구현되지 못했다.
여기에 약 7개월의 시간을 썼다.
많은 것은 예측가능한 것이 중요하다.
경제도 그렇고, 우리네 일상도 그렇고, 아마도 행정과 법도 그러할 것이다.
그래야지만 계획을 세울 수 있고, 실행을 위한 준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위해 건축법을 비롯해 명문화된 가이드를 확인하고 해서
건축주와 함께 계획을 세우고 설계를 한다.
법규에서 규정한 테두리 안에서 하면 가능할 것라는 예측을 갖는 것이다.
그러고도 모호한 부분이 있으면 인허가 담당 공무원과 사전 협의를 해서
그 예측가능성을 높이려는 노력을 한다.
하지만 이 심의라는 절차는 법 위에 존재하는 듯 하다.
어떤 기준과 능력으로 선정되었는지도 모르는 심의위원의,
그때그때 달라지는 개인적인 성향과 판단에 따라 법에서 규정한 인허가절차가 좌지우지된다.
이러니 심의는 예측불가능한 변수가 된다.
건축설계를 하는 입장에서 보면 그러하다.
정말 무당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 된다.
이 영역에서는 적어도
대한민국은 법치국가가 아니라 심의가 통치하는 국가이다.
건축심의의 문제가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여러 이유가 있는 듯 하다.
건축사들이 밥벌이를 위해서 각종 심의기구 설치를 위해 노력하기도 했고,
(마치 지정감리제 도입 등과 마찬가지로)
공무원들의 책임회피용으로 심의위원회는 좋은 구실이 되는듯 하기도 하고,
위원회라는 걸 거치면 좀 더 좋은 결과과 만들어질거라는 우리사회의 통념도 작용하는듯 하다.
건축계의 많은 이들, 특히 설계를 주업으로 하는 건축계에서
심의제도에 대한 성토는 어제오늘의 얘기는 아니다.
그 폐해와 부작용은 차고 넘친다.
건축사는 그 자격증에 맞게
법의 테두리 안에서 설계를 하고,
그 결과에 대해 문제가 있을때 책임을 지면 된다.
건축사 자격증이라는 건 이 사람이
그러한 능력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일테다.
어떤 의사가 수술 전에
그 수술에 대해 다른 의사들로 구성된 심의위원들에 의해
수술 방식과 판단에 대해 심의를 받는가,
어떤 의사가 다른 의사의 수술에 대해 이건 저렇게 해라,
여긴 요만큼만 해라 하고 책임도 못질 의견을 쏟아 내는가.
여기에 더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수술도 많이 안하는 의사가 수술로 먹고 사는 전문의의 수술에
심의위원이랍시고 참견하는 꼴이다.
건축 심의위원들이 그럴 자격이 충분한지를 묻는 것이다.
제발 이제
이런 불필요하고,
시대착오적이며,
건축가 스스로의 권위를 땅바닥에 내팽개치는 짓은 그만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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